장 볼 여유

행복이었다

by 안나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하던 날이었다. 시간이 더 걸렸지만 늘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경로로 집을 향해 걸었다. 해를 보지 못한 채 퇴근하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붉은 해를 바라보며 집을 향해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집 근처에 도달하자 이 소중한 여유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잠시 길가에 멈춰 선 채 고민했다.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플랫화이트를 한 잔 사 마실까. 공원을 한 바퀴 돌까. 옷 구경을 갈까. 많인 고민 끝에 내 발걸음이 자연스레 향한 곳은 허무하게도 '마트'였다. 마감 시간 직전 급하게 방문해 의무적인 생필품만 담아 쫓기듯 나오곤 하던 그곳.


무엇을 사야 할지 정하지 않은 채 들어왔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카트 안에 가방을 턱 던져놓고 여유 있게 걸으며 눈알을 천천히 굴렸다. 그동안 먹고 싶다고 생각하기만 했던 복숭아와 달콤한 바나나를 담았다. 유일하게 일주일에 한 번쯤 해 먹는 집밥을 더 건강하게 해 먹고 싶어서 잡곡도 골라 담았다. 유령 머신이 되어가는 커피 머신에 넣을 캡슐 커피도 신중하게 골랐다. 늘 먹던 맛이 아닌 흥미로워 보이는 풍미를 가진 맛으로. 관심 있는 물건들 앞을 서성이며 구경하는 재미도 누렸다. 예쁜 식기류, 감성 자극하는 원목 도마, 어떤 액체류도 맛있게 느껴질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머그잔들.


천천히 마트 안을 산책하 듯 한 바퀴 돌고 나니 꽤 많은 물건들이 카트 안에 담겨 있었다. 양 손 가득 장 본 물건들을 집어 든 채 집으로 돌아왔다. 유통기한 지난 잼, 주스 등을 처분한 뒤 냉장고 속을 건강하고 싱싱한 것들로 채워 주고 나니 두피에 땀이 송골송골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시원한 물과 좋아하는 향의 샴푸로 샤워를 한 뒤 보송보송한 깨끗함에 스스로 취한 채 복숭아를 깎았다. 말랑한 그것들을 입안에 넣어준 채 정성스러운 오물거림을 행했다. 달콤함과 시큼함이 입안에 동시에 퍼져 나갔다. 조금만 더 익으면 완연한 달콤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판단 하에 금세 한 알을 해치웠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나른함을 느낀다. 창밖으로 사람들 소리와 새소리가 얕게 어우러져 귓가를 간지럽힌다. 양쪽 눈꺼풀이 무겁게 꿈뻑이다가 서서히 잠긴다. 밤마다 억지로 청하려 했으나 다음 날에 대한 걱정으로 이루지 못하던 단잠에 잠시 빠진다.




이처럼 몇 주전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대단하지도 특별할 것도 없던 날이었지만 당시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이제야 '행복'이라고 정의해본다. 늘 커다란 목표를 이루었을 때 행복할 것이라고 스스로 압박하던 그 행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서 낯설었지만.


장 볼 여유를 느낀다는 것. 내가 먹고 싶고 필요한 것들을 살펴보고 고르는 행위를 시간에 쫓기지 않은 채 유유히 할 수 있는 것. 양손은 무겁지만 명치가 묵직하지 않고 가볍게 느껴지는 것. 다음 일 걱정 없이 꿈나라에 푹 빠져들 수 있다는 것. 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이 분명 행복이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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