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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와 고유 Feb 03. 2024

무용은 점점 강박과 집착이 되었고,


여느 직업의 세계처럼 무용도 경쟁이 있다. 내가 바라는 예술가들과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오디션이란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여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통과를 하고 작업에 들어가서도 작품을 만들어가는 전 창작과정에서 각자의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커튼콜 무대 위 공연자들을 바라볼 때, 대개는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분위기, 서로에게 영감이 되는 예술창작과정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꼭 그렇게 이상적이지만은 않다. 실상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치열함이라든지, 은근한 질서나 기싸움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안무자가 본인이 원하는 질감이나 감성 등을 무용수가 표현해내도록 심리적, 신체적으로 압박하고 몰아붙일 때도 있다. 안무자와 무용수 사이에 마찰도 많이 생기고, 무용수들 사이에 암묵적이고 묘한 세력이나 질서가 잡히기도 한다.

그저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냥 즐겁게 춤추는 일은 절대 없다. 쏟아 부어야지 뭔가 나오지 그럭저럭 즐겁게만 해서는 안 된다. 다들 죽어라 한다. 그렇게 해왔기에 그곳에서 서로 만난 것이다. 무용수 각자는 자신의 창조성, 신체적 기량과 개성을 온전히 쏟아 붓는 것이다. 그렇게 작품이 만들어진다.



작업이 끝나면 나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 소진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 안에 착실히 축적되어가는 나만의 은밀한 실력 혹은 내공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한 단계씩 내적으로 커지고 상승한다는 이 느낌. 남은 절대 모르는 나만 아는 깊은 만족감이자 자부심이었다.

어느새 나는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예술가들을 상정하면서 한 판 한 판 게임 퀘스트를 깨어가듯 춤추고 있었다. 그들의 필요와 요구, 그들의 잣대에 맞아떨어지는 것으로써 내 존재와 실력에 대한 불안과 의심을 해소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들의 인정을 갈구했다. 그들이 인정해주면 나는 역량이 있는 것이고,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나는 별 볼 일없는 형편없는 무용수였다. 나는 의심과 불안으로 자주 고통스러웠다.

그들의 잣대에, 틀에 들어맞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연구하고 이렇게 저렇게 옷을 바꿔가며 입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그 모든 과정이 나의 역량을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없었다. 빛나는 외부의 틀만 있었다. 그 틀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이런 나를 어떡해서든 채워보려고 외부의 인정을 더더욱 갈구했다. 그랬기에 나는 속에서 자주 찌그러지고 문드러졌다.



내 존재에 대한 안정감을 확보하려면 그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잘해야 했다”. 그러나 주위에는 나보다 뛰어난 동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졌다. 내가 여기에서 살아남고 인정받아야 하므로, 그게 내가 살 길이므로 강박적으로 연습을 하곤 했다. 동료의 장점을 관찰하여 혼자 연습하고, 안무자에게 피드백 받은 부분이 있으면 전체 연습이 다 끝나고 혼자 밤에 따로 연습을 하러 가기도 했다. 쉬는 날에도 혼자 연습을 하러 갔던 날들이 있었다. 쥐어짰다. 더 해야 한다고, 너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다고. 더 해야 돼, 더 해야 돼... 몸을 너무 많이 쓰고 오면 몸에서 열감이 잘 식질 않았다. 자주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면서 잠을 청했다. 아침에는 기운도 하나 없고 몸도 딱딱해서 뜨거운 물로 몸을 지지곤 했다.

춤추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졌다. 나는 왜 이리 열등해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가,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대체 얼마나 뼈를 갈아 넣어야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될 수 있을까. 언제쯤 이 필사적이고 처절한 고군분투가 끝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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