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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와 고유 Jun 29. 2024

다시한번, 여물위춘 與物爲春: 타자와 함께 봄이 되다.

예전에는 그저 내가 배운 그대로,  그대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수업이라고 생각했었다. 수업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나, 타자의 상황과 상태와는 관계없이 나는 내가 배운 것을 그대로, 내 수준에서 최선으로 전달을 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한마디로 내가 계획해서 준비하고 정해놓은대로 순서대로 쭉 나열하고 진행하면 되었다, 내가 배운 방식 그대로. 그래서 오히려 확고하고 과감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업은 단순한 혹은 기계적인 지식 전달 이상의 무언가를 품은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적 내용의 높음이나 깊이 자체, 혹은 지식전달 자체라기보다는 수업이 일어나는 상황과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것, 순간순간의 상황에 대처하고 유연하게 풀어갈 줄 아는 것, 당기고 밀고 기다리고 끌어갈 때를 파악하는 것. 다시 말하면, 타자의 상황과 상태에 대한 헤아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수업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단번에 잘 포착되지 않는 타자의 심리적 신체적 에너지, 수업상황의 분위기나 흐름에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정해놓은대로 내가 배운 그대로, 마치 수학문제를 공식에 그대로 똑같이 기계적으로 대입해서 풀어가듯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인격적인 측면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업은 '지식의 탁월함, 지식의 전달' 차원이라기 보다는 인격의 차원에서 더욱 묵직한 의미를 지니고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표면적 지식전달" 이전에 먼저 타자들과의 만남이다. 같은 지적 내용이라도 내가 만나는 타자에 따라, 일어남의 상황과 순간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조심스레 접근하고 풀어들어갈 수 있는 헤아림. 그것없이 내가 정해놓은대로만 내식대로만 타자에게 강요한다든지, 혹은 내 욕심으로 내눈으로 왜곡하여 타자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타자에게 다가갈 수 없다. 타자와 함께 진정 봄이 될 수 없다. 신비스럽고 다층적인 베일에 싸인 존재, 내가 아닌, 내가 전혀 모르는 그 타자를 잘 만나고 잘 들을 수 있어야 겠다.



수업의 순간순간 속에서 달뜨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타자를 만나고 듣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어찌보면 수업뿐만이 아니라 매순간의 삶이 그래야 할 것이다. 나이가 사십이 되어도, 나이만 먹고 여전히 '지 속에만' 빠져있고 '지 시선, 지 눈에서만' 허우적대는 나 자신, '지 밖에' 모르는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글을 쓴다.



다시한번, 여물위춘 與物爲春: 타자와 함께 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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