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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와 고유 Aug 13. 2023

[나의 무용 이야기] 수강생분과의 대화에서.


수강생 한 분이 내게 물으셨다.

정형성의 틀을 탈피하라고, 내면을 자유롭게 몸으로 움직임으로 표현하라고 하는데 그럼 왜 그것을 위해서 움직임을 배워야 하느냐고. 모순적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부분이 정말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천천히 곱씹게 하는 것이었다.

아니, 몸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라면서 움직임의 일정 형식과 틀을 배워야 한다니 말이다. 다시 정형성의 틀로 회귀하라는 말인가;!




수강생분의 말씀대로 몸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 형식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다소 모순적으로 보인다.

왜 틀에서 나오라면서, 자유롭게 표현하라면서, 틀을 배우라고 하는걸까.

방종이나 자위같은 형태로 경질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 같다.

내적 표현을 위한 야생성, 거친 순수성은 중요한 하나의 요소이다. 그러나 절제가 없다면 자기 감정과 움직임에 함몰되기 쉽다. 다른 사람은 없고 오직 자기, 자기 만족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하고 충실한 표현일까.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깊은 진실성에 다다르는 방법일까? 이것이 과연 예술성의 표출일까.

자기 만족뿐인 걸러지지 않은 거친 표현들, 사유없고 절제없는 표현들이 과연 우리가 진정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절제가 없다면 높은 수준의 자유가 아닌, 자유라는 껍데기를 가볍게 뒤집어 쓴 방종이나 자위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정 형식과 틀을 몸에 쌓는 수련을 통해서 몸과 정신의 절제를 배우고, 조절능력을 향상시키며, 몸과 정신의 어휘를 풍부하고 섬세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형식과 틀에 빠져서 그것이 또 전부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들이 쌓여가며 성숙하고 고유한 수준을 향해 갈 때, 보다 진실해지고 자유로워진 나, 나만의 몸짓에 한발자국씩 가까워지지 않겠나 생각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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