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꿈의 격차 04화

작은 기업에서의 첫 직장 생활

by 서지영

자존감이 최저점을 찍다 못해 바닥을 뚫고 지나가고 있을 때 나는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내 자존감만큼이나 첫 직장 생활 역시 가장 밑바닥이었다. 요즈음 대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다양한 자격증은 물론이거니와 복수 전공에 봉사활동까지 다양한 활동들을 한다고 한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봉사활동 장소까지 이동할 차비도 없었고, 수많은 자격증을 취득할 여윳돈도 없었다.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 드리기 위해 장학금을 받아야 했고, 아르바이트를 했어야 했다. 결국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정보가 많지 않았다(지금과 같이 인터넷이 발전한 시대가 아니었다. 이제 막 인터넷이 발전한 시기였고 인터넷이라도 하려면 전화선을 컴퓨터에 연결하는 번거로움과 전화비용을 걱정해야 했었다). 학교에서는 학과 관련된 지식은 채워줬지만 취업을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부모님 또한 단 한번도 취업이라는 절차를 겪어본 경험이 없다 보니 어떤 조언도 해줄 수 없었다. 매 순간 나 자신을 방어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지만 현실은 밑바닥이었다. 시작이 초라했다고 불평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억울한건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의 인생은 중고등학교때 얼마나 집중해서 공부했고, 어떤 대학을 진학했는지에 따라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대학의 레벨에 따라 취업할 기업의 레벨이 달라지고, 연봉이 달라지고 배우자가 달라지고, 마지막으로는 나의 자식에게 그 달라진 레벨의 혜택을 물려줄 수 있다. 그래서 부뿐만 아니라 빈곤 역시 되물림 된다는 말이 옳다는 생각을 해본다. 매 순간 뱉어내는 말들이 불만과 불평이 뒤섞인 욕설 뿐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과 부모와 함께 책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하며 성장한 사람이 어떻게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 지독할 정도로 자식들의 교육에 과몰입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이 무척 부럽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인생 첫번째 면접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회사는 지하철 역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었고, 무엇보다 집에서 꽤 먼 거리였다. 면접은 한번만 진행되었고 면접자는 총 세분이셨다. 사장님, 이사님, 그리고 개발 팀장님이 나를 평가하기 위해 모이셨다. 매우 작은 건물에 두개의 층을 빌려 쓰는 작은 회사였다. 직원 역시 10명 정도로 그야말로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였다. 나에게 물었던 내용들은 기술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신입인 점을 고려하여 배움에 대한 태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내면의 어디에서 그 태도를 보셨는지 다행히 합격하면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나는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개발자였다. 솔루션을 개발하는 팀에 막내로 합류하였지만, 주요 업무는 솔루션 개발이 아닌 프로젝트 투입이었다. 약 1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밤을 회사에서 지새웠다.

나의 업무는 프로그램 개발이었다. 예전에는 개발자라고 직업을 소개하면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지금은 넥슨이나 네이버, 카카오톡과 같은 회사들 덕분으로 개발자들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개발자들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개발자들의 높아진 위상은 신문기사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기업마다 개발자 인재들을 서로 모셔 가기 위해 그들의 연봉은 1억을 가뿐히 넘긴다고 한다(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모든 개발자들의 연봉이 모두 1억을 넘기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개발자들이 하는 일은 소프트웨어라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바(Java)나 파이썬(Python)과 같은 개발 언어를 이용하여 게임, ERP, CRM과 같은 소프트웨어 제품을 개발하는 것(만드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하나의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적게는 10명 미만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공동작업이 있어야 완성되는 것이 소프트웨어 제품이다. 즉, 여러 사람들이 모듈별로 쪼개진 부분들을 개발하고 최종적으로 하나로 합쳐지는 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몫을 해내지 못한다면 소프트웨어 제품 전체 일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공동작업이 중요한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나는 구멍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적게는 5년에서 많게는 10년 이상 경력을 갖는 분들과 어찌 경쟁이 되겠는가. 하지만 나는 내가 구멍이라는 것이 싫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업무가 끝나면 남아서 공부했고, 공부하다 보면 대중교통이 끊기는 시간이 다반사였다. 회사는 지금의 벤처와 같은 분위기였다. 늦은 시간까지 일하거나 공부를 위해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잠을 잘 수 있는 간이 침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층 침대였는데 일층은 주로 내 차지였으며 이층은 사장님, 이사님 혹은 개발 팀장님이 번걸아 가면서 사용했다.

내가 프로젝트에 투입되었을 때의 일이다. 회사는 개발팀과 시스템 구축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프로젝트 특성상 시스템 구축팀과 일할 기회가 있었다. 작은 프로젝트였기에 준비하고 배포하는데까지 한달 정도 소요되었다. 그 기간동안 그들의 일을 지켜보는데 상당히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개발자와 맞지 않았다. 개발을 위해서는 논리적인 사고가 필요한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그때 당시 나는 자존감이 초절정에 이를 정도로 바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이던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을리 없었다. 낮은 자존감은 나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붙이더니 급기야 나 자신을 집어 삼켜버렸던 것이다. 자존감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나는 개발자와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시스템 구축팀과의 협업은 새롭고 즐거웠다. 그들이 하는 일에는 논리적인 사고는 필요하지 않았다. 결론이 정해진 상태에서 그 길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내는 것이 그들의 업무였다. 결국 난 그들의 업무를 배워 보기로 했다. 개발자로 채용되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 변경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업무 시간 이후에 그들을 붙잡고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물어보는 것이었다. 소심했던 나에게 그것은 굉장한 용기였다. 하지만 용기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재미있었다. 일주일 내내 집에 갈 수 없었지만 공부가 재미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 역시 동생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주듯이 친절하게 많은 지식을 전달해주었다. 그때는 아무리 밤을 세워도 힘들지 않았다. 누가 시켜서 했던 공부가 아니고, 정말 원해서 했던 공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2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문제없었다. 지금은 하루만 밤을 세워도 일주일을 고생해야 하지만 그때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지 않고 모든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직장생활이 즐거웠던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20대에서 30대 중반까지 대체로 연령대가 낮았다. 물론 일부는 개인주의 성향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어느 조직에서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성향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친절하고 진취적이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추후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나보다 2살 많은 선배였다.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 적이 거의 없던 나의 행동들이 가끔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배는 나를 귀여운 동생처럼 대해줬다. 그녀 본인에게도 동생이 있다며, 나의 무례한 행동들을 귀엽게 봐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녀와 종종 연락하며 지낸다.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본인의 삶을 살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녀의 모든 선택을 지지하고 믿는다.

내가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같이 소외되고 불안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나와 같은 어둠의 그림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일찍이 만났던 그녀의 남자 친구(현재는 그녀의 남편이다)를 사랑하고 그로부터 사랑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최소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멀리하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사람으로부터 희망을 찾았고 지금은 그 희망데로 살고 있다. 어느덧 그녀의 큰 딸은 고등학생이라며 사진을 보내주었다. 한껏 멋을 부려서 인지 제법 숙녀 티가 나는 그녀의 딸이 부러웠다. 멀찌감치서 찍힌 그녀의 환한 얼굴에는 티끌만큼의 고민도 있어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언니 같았고 때로는 친구 같았던 선배는 현재 미국에 거주중이다. 남편이 주재원으로 미국에 가게 되면서 가족들 역시 함께 갔기 때문이다. 선배가 한국에 있을 때 우리는 2년이나 3년에 한번씩 안부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주로 그녀로부터 온 안부 인사였다. 무신경한 나는 지금도 사람을 챙기는 일에 서툴다. 가끔 전화하여 연락 좀 하고 지내자는 그녀가 고맙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언제든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최근에는 미국에 거주중인 선배와 더 많은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낸다. 사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대화의 공통분모가 없다. 그녀는 아이들의 진로 문제로 고민이 많지만 나는 나의 커리어와 미래에 관심이 많다. 그녀가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 이런 저런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공감이 힘들다. 오히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아이들이다. 사춘기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녀의 아이들에게 더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직 부모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좋다. 한없이 따뜻했고 힘든 시기에 큰 위로가 되어준 그녀였기에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가끔 퇴근하는 날이면 우리는 지하철역까지 함께 걷곤 했는데 그때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녀의 가족 이야기,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 그녀의 현재 고민거리들.. 하지만 나는 내 가족에 대한 얘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다. 이것은 유독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친하건 친하지 않건 나의 지난 과거와 나에게 상처만 남긴 가족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어느 누구에도 해본 기억이 없다.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몇 년 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내용은 이러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면서 가족애(혹은 죄책감)를 그린 소설이었다. 소녀의 아버지가 살해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살인자를 찾아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반전이 있었다. 아버지의 범인으로 지목된 이웃집 남자는 실제로 살인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법정에서 살인자의 무죄가 밝혀지며, 그 진범을 아는 이가 소녀로 밝혀졌다. 문제는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말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죽음에 대한 목격 때문이었는지, 상실감 때문이었는지 소녀는 입을 닫았다. 그러던 그녀가 증인석에 앉아서는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범인을 지목했는데, 소녀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검사였는지 변호사였는지 소녀에게 다가가 왜 그동안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며,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며, 소녀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자 그녀가 눈물을 터뜨린 것이다. 소녀는 드디어 입을 열어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진실이 그대로 입밖으로 나올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소녀의 진심 어린 고백에 가슴이 아팠다. 어린 소녀가 꼭 나와 닮았다. 모든 진실이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나와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될 것 같았다.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들은 나를 불쌍하게 여기거나 나를 멀리할 것이 분명했다. 불행은 마치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의 첫 직장 생활은 1년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새롭게 접한 공부가 재미있었고, 사람들도 너무 좋았지만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1년이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나를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기존 직원들은 모두 자신의 밥벌이를 했던 반면 이제 막 입사한 나는 투자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의 자존감은 또 한번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회사에서 해고된 후 나는 혼란스러웠다. 또 다시 신입으로 입사하기에는 1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경력으로 취업하기에는 경력이 너무 짧았다. 무엇보다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또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때 내 나이 24살이었다. 24살이되도록 목표를 세우거나 성취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더 괴로웠다. 성공에 익숙한 사람은 계속해서 성공의 길을 걷게 되지만, 실패에 익숙한 사람은 실패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늘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어차피 안될 텐데’, ‘내가 뭘 해낼 수 있겠어?’, ‘나도 내 부모 정도의 삶을 살다 죽겠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단 한순간도 나 자신을 믿어준 적이 없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 따위도 없었다. 희망이라는 것을 보고 자란 것이 아니어서 그것에 대한 개념도 실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화가 났다. 성공을 보고 자라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 방법을 모르는 것도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래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 인생을 관통하여 오롯이 나의 몫으로 남아있었다. 실업 상태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터널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한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대학 시절 많은 도움을 주셨던 교수님의 소개로 취업에 성공하긴 했다. 예전보다 조금 더 큰 규모의 회사에 입사했지만 여전히 자존감은 낮은 상태였다.

두번째 회사 역시 개발자로 입사했다. 짧은 1년의 경력이었지만 그 경력을 살려서 개발자로 취업한 것이다. 나의 주된 업무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직원들을 위한 일정관리, 거래처 관리 및 회사의 공지사항 등의 기능이 포함된 포탈을 개발하는 것이 나의 주된 업무였다. 입사하고 나에게 업무가 주어졌을 때에는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하고 초조했다. 첫번째 직장 1년동안 명목상 개발자였지만 제대로된 결과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나에게 주어진 업무를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8개월 후에 소프트웨어 제품 하나를 혼자서 개발해냈다. 뿌듯함 보다는 안도감이 컸다. ‘아..결국 해냈구나.’ 이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보다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첫 직장에서 재미있게 공부했던 업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업무에 활용하고 싶었다. 결국 시스템을 담당하던 팀장님께 진로 상담을 요청하면서 개발자보다는 시스템 엔지니어로 업무를 변경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지난 경험과 관심 분야에 대해 꽤 긴 얘기를 전해드렸던 것 같다. 한참을 아무런 얘기 없이 들어주시더니 당장은 업무 전환이 힘들기 때문에 6개월 정도의 유예 기간을 갖자는 말을 남기셨다. 그때 당시에 유예 기간이라는 말을 거절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약속을 지켜 주셨다. 나는 6개월 후에 시스템 관련 업무를 맡게 되었으며 그 업무는 다양한 방면으로 확장되면서 현재의 업무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때 나의 평생 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 한순간도 그 결정에 후회한 적이 없다. 아무리 개발자들의 연봉이 높아졌고 위상이 높아졌다고 해도 나와 맞지 않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가끔 미련은 남는다. 온 힘을 다해 개발이라는 업무에 집중했었다면 그 결과가 처참했더라도 미련은 남지 않았을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중도 포기한 것이다. 미완성 상태에서 중도에 포기하면 그 기억이 평생을 따라다닌다.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간에 도망치면 남는 것은 자괴감과 실패자라는 꼬리표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업무를 바꿨다. 중간에 바뀐 업무로 나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선배들이 외근을 갈때마다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으며, 그들의 업무를 하나하나 눈에 새겨 두려고 노력했다.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방어적인 성격까지 이해하고 받아주는 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더 사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4년 가까운 직장 생활 후에 여기서도 해고를 당한 것이다. 그때의 나를 되돌아보면 버림받기 좋은 사원이었던 것 같다. 윗사람들에게 싹싹했던 것도 아니고, 업무가 끝나면 퇴근하기 바빴다. 요즈음이야 상사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업무가 끝나면 퇴근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상사가 퇴근해야 아래 사람도 퇴근할 수 있는 그런 문화였다. 내 동료들 역시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항상 퇴근이 늦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효율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업무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면서 단순히 눈치 보느라 앉아서 웹 서핑만 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행동이 관리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다. 그들의 무례한 행동에는 얼굴부터 찌푸렸었고, 나의 말은 항상 직설적이었기 때문에 때로는 무례하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결국 회사가 어려워진 시점에 해고 1순위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두번의 해고는 나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최악의 상황이 지속될수록 앞으로 단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나는 해고된 그 자리에서 한동안 헤어나올 수 없었다. 실업 상태가 2년 이상 지속되면서 시간이 멈춰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저축해 두었던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지만 나의 삶은 좌절 그 자체였다. 그것도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당시의 무력감을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실업 상태로 지낸 첫 달에는 곧 취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5년 가까운 경력이 있었고, 내가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6개월이 되면서 불안감은 커져갔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없었다. 저축해 두었던 돈은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 보였고 흘러가는 시간은 내 목을 조여왔다. 시간은 어찌나 빨리 흘러가는지 1년이라는 시간은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던 시간들이다. 그때 당시 나의 실업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미리 알았다면 나는 좀 더 계획성 있게 미래를 준비하고 현재를 즐겼을 것이다. 악기를 다루거나(특히 드럼을 배우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운동을 했다면 매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2년이라는 매 순간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어머니가 눈에 밟혀 차마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단지 매일 기도했다. 이렇게 잠들면 제발 내일 눈뜨지 않게 해달라고.. 하지만 아침이면 어김없이 눈을 떴다. 찬란한 햇빛이 나를 비웃듯이 ‘봐,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어떤 희망도 갖지마.’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끝없는 터널속에서 미래가 불안했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해지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운명이 나에게 어떤 짓을 하던지 고스란히 당해주는 것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불행으로만 가득할 수는 없다.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지내보지 못했던 삶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늘 주눅들고 방어적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친구들과 어울려보지 못하여 사회성이 부족하였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나의 어떤 점이 문제였을까? 좌절의 늪은 허우적거릴수록 더욱더 나를 집어 삼키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나의 모든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나의 시작이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거나 혹은 더 밑바닥이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대부분의 책에서 소개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출발점은 다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거나 성공에 대한 집념을 가졌다. 그것도 아니면 정말 뛰어난 머리를 가졌거나.

하지만 지나온 나의 삶은 책에서 등장하는 그들의 삶과는 달랐다. 내게 주어진 환경을 무시하거나 극복할 만한 용기와 집념이 없었으며, 명석한 두뇌를 갖지도 못했다. 또한 나의 출발점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20년이 늦었다(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20년을 의미한다). 나는 태어나서 20년간 어떤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을 탓하거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1.JPG 나의 삶의 그래프

그래프는 내 인생 전체를 의미한다. 가로축은 시간을 의미하며 세로축은 행복이나 물질적인 성공을 의미한다. 요즘 사용되는 말로 나는 흙수저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행복하지도 물질적으로 여유있지도 않은 삶을 살면서 나는 그 어떤 것도 내 삶을 위해 시도해본 기억이 없다. 무엇인가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학비도 버거웠던 나에게 또다른 무엇을 시도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런 노력을 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를 읽어도, 삶에 영감을 주는 소설책을 읽어도 모두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글귀도 여유가 있어야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앞으로든 뒤로든 혹은 크던 작던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들만 지속될 수 있는지.. 내 인생은 그야말로 불행의 집합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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