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참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단 한번도 원하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의 내면을 헤집어가면서 알아봤지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 구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문지 않았다. 그렇게 한번, 두 번 참다 보면 어느 순간 습관이 된다.
마가렛 대처는 이런 말을 했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
결국 나의 참는 행동은 습관이 된 것이다. 나는 교복을 제외하고는 새 옷을 입어 본 기억이 거의없다. 어머니는 늘 내 옷을 동네 어딘가에서 얻어 오셨다. 누군가 입었던 옷을 입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부담감은 없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그때 당시 내 옷을 어머니가 사오셨던 것인지, 얻어 오셨던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럼에도 어린 나이에 명확하게 알았던 한 가지가 있다. 절대 무엇인가를 사달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엇인가 필요하다고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은 어머니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러고보면 나는 꽤 이른 나이에 철이 들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내 옷을 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회사에 출근을 하고, 고객을 만나기 위해서는 깔끔한 옷이 필요했고 그러한 이유로 옷을 구매하지만 나를 위한 지출에는 죄책감이 동반된다(그런데 정말 사회 생활을 위한 이유로 옷을 구매했는지도 궁금하다. 지금도 옷장에는 옷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입을 옷이 없다며 또 구매하는 것을 보면 필요에 의해서만 구매하는 것은 아닌듯 싶다) 지금은 내 옷을 사는 것보다 어머니 옷을 사는 데에 더 많은 투자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다.
늘 내 세상에 갇혀 살았던 나는 두번째 직장 생활부터 주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거나 회사에 출근을 하면 내 또래의 여자들이 한껏 꾸미고 다니는 것이 어찌도 눈에 잘 들어오는지.. 그들은 한송이 꽃과 같았다. 생기 있고 활기차고 아름다웠다. 액세서리는 그들의 몸 어딘가에 하나씩은 있었으며 화장도 자연스러웠다. 정장 차림의 그녀들은 그야말로 커리어우먼 같았다. 당당하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반면에 나는 나 자신을 꾸미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몸에는 그 흔한 액세서리 하나 없었으며, 화장은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나는 사람 간에도 예절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때 당시 나는 마치 동굴에서 혼자 지내다가 인간 사회를 막 접한 상태와 같았다.
하루 정도의 일탈은 가능하였을 수도 있었다. 단 하루만 아르바이트를 쉬고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단 하루만 장학금을 위한 공부를 미뤄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눈에 밟혔는지 모르겠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의 모든 욕구에는 죄책감이 동반되었으니까.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교를 졸업했던 것이다. 심지어 첫번째 직장에서조차 회사에서 밤새운 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진정으로 사회에 노출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두번째 직장에서 나의 억눌렸던 욕구가 터져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 가난 때문이었는지,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분간하기 힘들다. 결국 둘 다였겠지만. 그럼 이런 결론을 내려도 좋지 않을까 싶다. 결국 가난은 인간의 행동에 많은 제약을 가한다. 빈곤 자체는 단지 불편한 것이지 불행은 아니라고 했던 말은 결국 틀린 것이다. 이제는 자동차를 구매할 정도의 여유가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차를 구매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소유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퇴근 때마다 20분씩 기다려야하는 버스는 나를 더 피곤하고 짜증나게 한다. 하지만 잠깐의 피곤함 때문에 자동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결국 가난이 불편하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없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낄 수 없다. 반면에 불행은 다르다. 나는 빈곤으로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문대에 진학했고, 한창 꾸미고 싶은 20대 초반에도 어머니의 잔소리에 저축하기에 바빴다. 나의 첫번째 회사의 연봉이 1400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금을 제외하면 한달 급여가 고작 80~90 만원이었던 것 같은데, 부모님에게 생활비 드리고 교통비와 식비를 제외하면 모두 저축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달에 저축할 수 있던 돈이 많아야 30~40만원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부모님의 생활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가난은 되물림 된다는 말도 결국 맞았던 것이다.
빈곤이 불행하다는 논리에 대해 뒷받침할 경험은 충분히 많다. 나의 동굴 생활은 결국 빈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릴 돈이면 일주일 밥값을 충당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 어떤 것에도 나를 위해서는 함부로 돈을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나의 삶은 동굴속에 갇혀 있는 것과도 같았으며 그 결과 나의 사회성은 바닥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키워야할 시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하고 상당히 직설적인 편이다. 지금도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불편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나의 학습은 20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20년 정도의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버렸지만 이후 꾸준한 학습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빈곤은 불행하다는 말은 옳다.
동굴에서 나와 사회를 마주했던 나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나 역시 그들처럼 예뻐지고 싶었다. 그 순간 참고 참아왔던 물욕이 터져버린 것이다. 이제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급여의 대부분을 패션에 소비했다. 이쯤에서 고백한다. 나는 결코 예쁘지도 않고 마른 편도 아니다. 돌출된 광대뼈와 쌍꺼풀 없는 눈, 전혀 오똑하지 않은 코, 그리고 통통한 몸까지. 즉, 아무리 꾸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어쩜 외모까지 내 인생의 발목을 잡는 것인지.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소비에 열을 올렸다. 키가 작은 편도 아니면서 늘 7cm의 하이힐을 고집했다. 하루는 늦잠으로 출근 시간에 여유가 없었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지하철 환승역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계단을 굴렀다. 역시 하이힐이 문제였다. 무릎은 까져서 피가 멈추지 않았지만 창피한 것이 먼저였다. 지금은 3cm 하이힐도 감당할 수 없다.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예뻐 보이는 것보다 편한 것을 추구하게 된 결과 이제 하이힐을 신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끔 분위기 전환을 위해 3cm 높이의 구두를 신고 외출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중간에 저렴한 슬리퍼를 구매하여 바꿔 신고 길거리를 누빈다. 그때 당시에는 어떻게 7cm, 8cm 하이힐을 신고 하루 종일 외근을 다닐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내가 외모에 관심을 갖게 된 또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주관이 상당히 강한 편이다. 더 안 좋은 것은 내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의 태도나 외모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런 사람이 있으면 이런 사람도 있는거지’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달랐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객사를 방문할 때에도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다. 청바지가 편리하다고 하는 이유를 좀 더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가끔 문자나 카카오톡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안내 문자를 받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안내 문자를 보내는 이유는 목적은 시스템을 교체하거나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을 개선하는 등의 작업 때문이다. 특히 낮에는 사용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하기 때문에 언제나 야간이나 긴 주말(예를 들어 명절 같은 날)에 작업이 진행된다.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주로 야간에 해야 하는 그런 일이었던 것이다.
[카드사]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따른 일부 서비스 일시 중단 안내
□일정 및 상세 내용
- 중단기간: 2021.9.19 24:00 ~ 2021.9.20 09:00
- 중단 서비스:
① 대출 서비스
② 결제 서비스
또한 일을 하다보면 바닥에 주저 앉아 일하거나 쉴 때가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정장 차림이 더 불편했다. 함께 일했던 대부분의 남자 동료들 역시 나와 비슷한 차림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나의 옷차림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고객사에서 담당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여성이 눈에 띄었다. 분명 나와 같은 목적으로 방문한 것 같은데 한껏 꾸민 차림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귀걸이에 진한 화장, 정장 차림까지 깔끔하면서도 신뢰 가는 외모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나의 겉모습을 비교하면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 깨달었다. 내가 지켜왔던 가치관이, 생각이,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의 옷차림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캐주얼만 입다가 정장 차림으로 바꾼다는 것은 옷, 구두, 가방, 액세서리, 헤어스타일 등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돈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 자신의 외모를 잘 꾸미고 다니는 여자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부지런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예전처럼 외모를 가꾸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그럴만한 시간도 없지만 열정도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삶에 대해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지만 반면에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종종 ‘나때는 말야’라고 라떼를 찾는 것은 그때의 자신의 모습이 그리운 것이지 젊은 친구들에게 훈계를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젊은 친구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보고 있자니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 큰 것일 것이다.
그동안 구매해서 입고 신었던 모든 것들을 새로 구매해야 했기에 패션에 대한 소비가 끝이 없었다. 친구가 입었던 옷이 예뻐 보이면 그것을 샀고, 드라마 여자 주인공의 핸드백이 예뻐 보이면 그것도 구매했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욕은 마약이나 도박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현재 우리는 ‘소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언제나 소비를 권장하는 광고에 노출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인간은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에 익숙하다. 어느날 이런 기사를 읽었다. 유치원생을 둔 학부모였다고 한다. 어느날 아이가 이렇게 묻더라는 것이다. ‘엄마, 우리집 차도 벤츠야?’ A라는 친구, B라는 친구의 부모님 차가 모두 벤츠니까 우리집 차도 벤츠이어야 한다는 것이 어린 아이의 논리였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유치원생이 벤츠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의 부모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비교라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키워져 왔던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위치에, 더 넓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암묵적으로 훈련을 받아왔던 것이다.
나의 출퇴근 시간이 왕복 5시간이 넘었던 때가 있었다. 하루는 동생이 퇴근길에 나를 태우러 오겠다는 것이다. 그날 짐도 많았고, 모처럼 편하게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동생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냉큼 좋다고 했다. 그때 당시 퇴근 시간이 5시였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7시 40분 즈음에는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동생과 퇴근했던 그날의 퇴근은 3시간을 넘겼다. 막히는 차안에서 시간만 날려버렸던 것이다. 지하철을 탔다면 책을 읽거나 다른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차안에서는 멀리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좋은 삶이라는 것이 몸이 편한 삶인지, 마음이 풍요로운 삶인지 나조차도 가끔 헷갈리기 때문이다. 미친듯이 패션에 소비했던 그때의 내 삶이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신상품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바로바로 구매해야 직성이 풀렸고 또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도 내 옷장에는 태그도 떼지 않은 옷들이 많다.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색조 화장품들과 한, 두 번 신었던 구두들을 보면 ‘미쳤어, 어쩜 이렇게 한심하냐.’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 구매했던 대부분의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다). 소비의 삶이 얼마나 지속되었던 것일까? 7년이나 8년쯤 지속되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저축한 돈이 별로 없었으니까 나의 물욕은 최고 정점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욕의 결과는 파산 직전의 경제적 빈곤뿐이었다.
두번째 직장에서 만났던 동갑내기 친구와는 아직도 연락하며 지낸다. 영어 원서를 읽을 수 있도록 자극을 줬던 친구이기도 하다. 30대 후반 즈음에 우리는 저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폭발적인 물욕으로 저축해 둔 돈이 거의 없었던 나와는 달리 2억 가까이 저축했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30대 후반이면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친구와 같이 꽤 큰 돈을 저축했어야 정상이었다. 물론 20대 후반 무렵 어학원수 비용으로 그동안 저축해두었던 돈을 한방에 탕진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또다시 10년 가까운 기간동안 저축했으면 1억은 저축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통장 잔고에는 2천만원 정도가 전부였다.
나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내면의 나는 도대체 몇 개가 있는 것일까? 언제쯤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까? 어느 때는 소심한 나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웠고, 또 어느 때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방어적인 태도만 취했다. 그리고 이제는 끝날 것 같지 않는 물욕으로 저축해 둔 돈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나의 내면은 뒤틀리고 망가져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과거의 상처 때문이라고 변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이미 모든 것을 잊고 혹은 극복하고 내 인생을 살았어야 했다. 왜 지속적으로 과거의 상처에 발목을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친구와 저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도 나는 정신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소비에 열을 올렸다. 택배로 물건을 받고, 포장을 뜯는 순간 기대감이나 설레임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 병이었다. 쇼핑중독 역시 일종의 정신병으로 다음과 같은 증상이 있다면 충동구매장애를 의심해야 한다고 한다. (자료: 나무위키)
• 물건을 사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거나, 쇼핑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 구매 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 있다.
• 쇼핑할 때 죄책감이 든다.
• 가족들에게 쇼핑한 물건을 보이지 않게 숨기거나, 물건을 많이 산다는 지적을 듣는다.
• 내 소비습관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 쇼핑 말고는 별다른 취미가 없다.
• 정말로 필요한 물건이 아닌데도,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물건을 산다.
• 저축을 거의 혹은 전혀 하지 않으며 쇼핑으로 경제적 곤란을 겪은 경험이 잦다.
• 하루에 3시간 이상 인터넷 쇼핑을 하며, 심하면 10시간 이상 쇼핑을 하기도 한다.
내 경우에는 모든 항목이 해당됐다. 쇼핑중독의 원인으로는 외로움으로 인한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보상 심리가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다양한 원인들도 모두 충동구매장애의 원인이라고 한다.
•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하는 수단으로
• 적대감 발산
• 과도한 애정
• 외로움으로 인한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보상 심리
• 박탈감으로 인한 보상 심리
•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
나의 경우에는 낮은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외모를 가꾸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가장 의미 없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일까? 다른 방법은 알지 못했었고 외모의 경우 얼마든지 돈으로 가꿀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또한 외로움으로 인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소비를 했을 수도 있다.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티는 어디서든 날 테니까.
영원할 것 같은 물욕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일 것이다. 더 이상 나를 꾸밀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물욕이라는 것도 집착의 산물인 것 같다. 조금 더 일찍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때 마음껏 소비를 해봐서인지 그것이 의미 없는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들인 물건들은 내 방을 꽉 채웠다. 그 물건들을 바라볼 때마다 풍요롭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음은 더 공허했고 방 한가득 쌓여 있는 물건들은 처치 곤란이었다.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또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면서 살아왔던건지. 예전에는 소비의 개념이 단순히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것과 같이 상당히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요즈음에는 감정 소비, 역사 소비, 가치 소비, 컨텐츠 소비와 같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꼭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의미를 갖다 붙여도 나는 이제 소비가 지긋지긋하다. 나에게 소비는 경제적 궁핍을 불러오는 지름길일 뿐이었다. 이제 내 방에 고이 모셔 두었던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할 때가 온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나의 슬픈 과거도, 낮은 자존감도, 방어적인 태도도 이제 그만 떠나 주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