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꿈의 격차 06화

첫번째 인연, 그리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다

by 서지영

나는 사람과 친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금도 꽤 친하게 지내고 있는 예전 동료는 어느날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와 친하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친하다’라는 의미가 모호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사람과 사람이 친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라고 되뇌어 보았다. 결국 나는 ‘친하다’라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① 내게 좋은 일이 있건, 나쁜 일이 있건 상관없이 그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②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만큼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나에게는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준 세 사람이 있다. 먼저 첫번째 사람은 첫번째 직장에서 만났던 2살 많은 선배이다. 지금의 내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다. 아마 선배는 본인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첫번째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선배는 나에게 영어를 공부해볼 것을 권했다. 사실 그 전부터 지속적으로 영어 공부를 권했지만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때 당시에는 내가 맡은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버거웠고 시스템 업무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쪽 공부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처리해야할 업무가 없다 보니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선배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영어 공부를 권했다. 그때 당시 선배가 왜 그렇게 영어 공부를 권했는지 알 수 없다. 나의 미래를 위해 권했는지, 단순히 내가 무엇인가에 집중하여 힘든 시기를 잘 이겨 내기를 바래서였는지. 선배 역시 영어 공부가 재미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가방속에는 언제나 영어를 학습할 수 있는 교재가 있었다. 그녀의 업무에서 영어 활용도가 0%임을 고려할 때 그녀 역시 영어는 단순히 취미생활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였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설득당했다. 하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려니 겁이 났다.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가 늘 어려웠기 때문에 진도를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쪽이 아닌 포기 쪽을 선택했었다. 단어부터 문법까지 아는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을 듣더니 선배는 ‘회화부터 시작해봐’라고 조언해주었다. 내가 영어를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당시 내가 영어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은 ‘미래를 위해 유용하게 쓰이겠지?’라는 생각이 아니었다. 단순히 선배에 대한 동경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제2 외국어를 공부하면서도 재미있다고 말하는 선배가 대단해 보였다. 나도 선배처럼 되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언제나 여유 있어 보이는 선배가 부러웠던 것이다.

나는 결국 회화반을 등록하기 위해 학원을 방문했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안내 데스크에서 회화반을 등록하러 왔다고 하니 먼저 레벨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지. 나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니 가장 기초반부터 등록하겠다고 했지만 레벨 테스트는 반드시 필요하다며 마침 바로 가능하니 진행하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해준 분이 기어이 나를 레벨 테스트 장소로 이끌었다. 장소에 도착한 나는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레벨 테스트를 진행했던 분은 30대 중반 정도의 여자분이었다. 외모로 봤을 때에는 한국인이었지만 레벨 테스트 내내 한국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Hello, how are you?’로 시작되는 그녀의 질문에 내가 대답한 것은 내 이름 정도였다. 5분 정도 인터뷰가 진행되었던 것 같은데 마치 50분이 흐른 것 같았다. 너무 창피해서 빨리 인터뷰 장소를 빠져나와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결국 외국인 선생님이 진행하는 반은 갈 수 없었다. 레벨 테스트 자체가 의미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 선생님이 진행하는 회화반, 그러니까 가장 기초반을 배정받았다. 하..처음부터 레벨 테스트는 진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건만, 결국 상처만 남은 레벨 테스트였다. 우여곡절 끝에 학원을 등록하고 다음달부터 수업에 참여했다.

기대반 우려반으로 참여했던 수업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Hi I’m Jiyoung. Nice to meet you. What’s your name?’ 첫날 배운 것은 이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 자체가 새롭고 즐거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모두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서 비슷한 콩글리시로 주고받는 대화였다. 나 혼자 유독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과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반 친구들이 있어 더 즐겁게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몇 달 후 취업에 성공한 후에도 나는 영어 수업에 계속 참여했다. 저녁에는 약속이 많을 것을 우려하여 새벽반을 등록했다. 새벽반 영어 수업은 6시 30분에 시작했다. 새벽반에 참여하기 위해 4시 40분에 일어나는 생활을 5년간 지속했다. 학원을 다녔던 5년 동안 단 한달도 쉬지 않았고 회식으로 늦게 귀가했어도 결석은 하지 않았다. 5년간의 꾸준한 영어 공부 덕분에 현재 나는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5번의 인터뷰는 모두 현지인과 영어로 진행되었고 합격한 현재도 수시로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유난히 언어에 감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5년간의 성실함의 결과이지 않았을까 싶다.

영어 공부를 했던 5년 동안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사실 매 순간이 도전이었다. 교재는 온통 새로운 단어들 뿐이었고, 접속사와 전치사, 동사의 시제 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회화 반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모든 문법을 질문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선배에게 다시 연락했다. 영어를 회화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교재의 문장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어려운 부탁을 조심스럽게 했다. 주말마다 나를 만나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평일에 공부하면서 모르는 부분들에 대해 주말에 1시간이라도 만나서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선배는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집안 일들을 처리하거나 남자 친구를 만나는 등 할 일이 많았을텐데도 흔쾌히 허락해준 그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우리는 1년 가까운 시간을 주말마다 만났다. 나의 질문 수준이 너무 낮았음에도 단 한번도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우리는 본격적으로 문법 공부를 시작했다. 교재를 선정하고 매주 조금씩 진도를 나갔다. 그때 나는 무서울 정도로 지식을 습득했다. 이미 말했지만 나는 20년의 인생을 버리고 시작했다. 그 말은 이 시기에 했던 영어 공부가 첫번째 공부였다는 의미이다. 물론 첫번째 직장에서 잠깐 했던 시스템 관련 공부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목적이 다르다. 시스템 공부는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했다면 영어는 오롯이 재미 있어서 했던 공부였다. 최근 한국어보다 영어를 사용하는 일이 더 많아지면서 영어는 더 이상 재미가 아닌 생계수단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영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것으로 보아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공부는 진정으로 재미있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어떤 상황이던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되면 자기 소개라는 것을 하게 된다. 이름, 나이, 가족관계 등 자신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상대방이 묻는다. ‘취미는 뭐에요?’. 그럴때마다 내 대답은 늘 같았다(나는 주로 내 소개를 장황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말했어야 할 취미를 상대방이 묻곤 했다). ‘영어 공부와 책을 읽는 것이요’. 독서는 온 국민의 공통 취미생활이다. 이력서에는 ‘취미’라는 항목이 있다. 최근에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예전에는 어김없이 존재했던 항목이다. 답변 또한 정해져 있는듯하다. 온 국민의 공통 답변은 ‘독서’이다. 그 정도로 독서라는 내 답변에 놀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영어 공부는 다르다. 모든 사람들은 의외의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 눈빛에는 이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굳이 왜 영어를?’ 혹은 ‘사실대로 말해, 영어가 취미일리가 없잖아’라는 의미의 눈빛일 것이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옹알이하는 과정을 거쳐 단어를 배우고 문장을 배울때 얼마나 즐거울지 상상해보자.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의사 소통의 수단은 울음뿐이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면서 원하는 것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표현하게 된다. 원하는 것들만 말하다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인간대 인간으로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진정한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가 중요한 것이다. 언어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것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친구가 될 기회가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영어를 배우는 것이 좋았다.

가끔은 영어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문장을 통째로 외운 적도 있다. 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 사이에 머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선배와 함께 공부했던 1년은 내게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의 희열을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나의 영어에 대한 열정은 두번째 직장에서 동갑인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더 뜨거워졌다. 나보다 늦게 입사한 동갑내기 친구는 그동안 만나봤던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언제나 예의를 갖추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친구였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다른 한국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마도 어린시절의 어학 연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외국 문화를 몸으로 습득한 그녀였기에 다른 한국 사람들의 행동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라 추측해본다. 처음에는 나 역시 거부감이 있었지만 동갑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친구가 되었다. 그녀를 알게되면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영어책(원서)를 읽어보려는 용기를 낸 것이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영어가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영어를 꽤 유창하게 했고 늘 손에서 원서가 떠나지 않았다. 친구의 업무 특성상 외국인과 대화할 기회가 종종 있었던 그녀는 유창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는 그때 영어를 공부한지 2년이 조금 지난 상태였기에 여전히 외국인과의 대화는 부담스러웠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외국인과 전화로 대화하거나, 외국인이 방문할 때마다 호스트 역할을 하는 그녀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친구는 취미가 독서인지, 영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언제나 가방안에는 원서들이 있었다. 짧게는 한달에 한권, 길게는 6개월에 한권 정도 읽었던 그녀를 닮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원서를 읽어보기로 했다. 읽다가 어려우면 번역책으로 바꾸면 되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에 읽었던 책이 그 유명한 ‘해리포터’였다. 이미 선배와 문법에 대한 공부를 마쳤고, 2년간 수많은 새로운 단어를 접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왔던 것인지.

나의 도전에 대한 결과가 모두 궁금할 것이다. 결론은 성공이었다. 나도 모르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영어를 공부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내용을 즐기고 있었다. 아마도 해리포터 세번째 시리즈인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보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출퇴근길에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음악이 Blue의 ‘One Love’이다. 유독 해리포터 책을 읽을 때마다 반복 재생으로 들었던 One Love였기 때문에 해리포터 책을 볼때마다 One Love라는 음악이 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지금 생각해도 해리의 모험과 One Love의 멜로디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마지막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는데 한페이지 한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 너무 아쉬었다. 나의 첫번째 원서이면서도 오롯이 내용에 집중할 수 있는 책이었기에 영원히 멈추지 않기를 바랬던 마음이 컸다. 나는 해리포터를 내 상상속의 인물들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 영화도 보지 않았다. 해리와 친구들의 모험은 이미 상상속에서 충분히 흥미로웠기 때문에 현실의 인물들로 다시 채워 넣고 싶지 않았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마스터한 이후 어떤 책이던지 원서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려운 책을 읽을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10대 소녀들이 읽을 만한 로맨틱 소설책을 선택했다. ‘쇼퍼홀릭(Shopaholic)’이라는 책으로 이 책 역시 해리포터와 같은 시리즈로 출시되었다. 제목 그대로 쇼핑에 중독된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해프닝에 관한 이야기이다. 해리포터와 마찬가지로 쇼퍼홀릭을 읽을 때에는 Sweetbox의 ‘Life is cool’이라는 노래를 반복 재생하여 듣곤 했다. 이 노래 역시 주인공과 잘 어울리는 멜로디라는 생각을 해본다. 2년 가까운 시기에 원서를 10권 이상 읽은 나로서는 더 이상 원서가 두렵지 않았다. 이제 원서 역시 단순히 그냥 ‘책’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 당시에도 지금도 영어가 술술 잘 읽히기만 했을까? 그렇지 않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여러 번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영어라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한글도 마찬가지이다. 모국어라고 해서 집중력을 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모국어도 이러한데 영어는 더 집중해서 봐야한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는데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한페이지에 적으면 2~3개 많으면 6~7개 까지의 새로운 단어에 대해서는 구지 사전을 찾지 않는다. 책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10개 이상의 단어가 나타나면 그때는 얘기는 달라진다. 이미 단어 때문에 내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좋든 싫든 사전을 이용하여 단어에 대한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서 해석해야 한다. 어느 순간 단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면 과감히 책을 던져버린다. 내가 볼 수준의 책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또 정말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번역책을 읽으면 되는 일이다.

영어 하나로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읽기를 포기했다면 멍청한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더 깊은 동굴속으로 들어가 방어적인 삶을 지속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책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인문학과 철학책이 어렵다. 어떤 책은 두 번, 세 번을 읽어도 도무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처럼 모국어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이 있다. 원서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먼저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매 순간 새로운 단어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하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캐릭터들을 100%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이렇게 조금씩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막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의욕이 넘쳤다. 이후 나는 수십권의 원서를 읽었다. 어떤 책은 내전으로 힘든 인생을 살아야 했던 주인공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어떤 책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죄책감에 관한 얘기로 슬펐다. 또 어떤 책은 사랑에 관한 저자의 주관이 흥미로웠으며, 어떤 책은 자기 계발서에 관한 것으로 성공과 성취에 대해 많은 자극을 주었다. 영어를 알지 못했다면 절대 접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었다. 무엇보다 영어를 말하거나 원서를 읽을 때의 나의 자세가 달라진다. 원서를 읽을 때에는 번역이라는 필터가 없기 때문인지 단어를 그대로 흡수한다. 책의 내용들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번역된 책은 왜 다르게 받아들이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책 속의 지명이나 캐릭터의 이름은 이국적인데 한글로 내용을 풀어나가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나의 경험들에 꾸겨 넣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영어의 경우는 영어 자체가 이미 이국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내용들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상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에 그대로 흡수가 가능하다. 나의 경험이 빠졌기 때문에 책 속의 캐릭터들에 대한 판단 역시 하지 않는다. 일단 책에서 설명하는 그대로 받아들인 후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야 생각해본다. ‘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상황에서 왜 남편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등에 대해 고민해본다.

결국 나는 5년간 영어 회화반을 수강했다. 가장 기초 레벨에서 시작한 영어 회화는 5년이 넘어서야 최상위의 레벨이 되었다. 물론 배워야 할 것이 많았지만 더 이상 언어는 배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최고 레벨에서도 1년 가까이 학원을 등록했던 이유도 무엇인가를 더 배워가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 나 자신을 최대한 영어에 노출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학원에서 만난 수많은 외국인 선생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반 특성상 매달 초에는 수강생들이 열정을 갖고 참여하지만 3주차 정도부터는 결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때에는 선생님과 나만 남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기 보다는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서로의 인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들은 주로 대학생이었다. 휴학 후 아시아 여행을 계획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들의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나의 영어 실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위한 사치를 누려보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나와 가족들에게.


다음은 내가 영어 공부가 즐거웠을 때 읽었던 책들이다. 혹시라도 이제 막 원서를 읽기 시작한 독자 분들을 위해 몇 권 소개하고자 한다.


[Can you keep a secret?] by Sophie Kinsella

쇼퍼홀릭이라는 책이 가볍게 읽기 좋았기 때문에 동일한 작가의 책을 찾아 읽었다. 이 책 역시 로맨틱 소설로서 주인공은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난 남자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시작되는 로맨스 소설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때론 어렵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특히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이라면) 나에 관해 털어놓는 것은 오히려 쉽다. 이 책은 기대할 만한 교훈이나 감동은 없다. 하지만 원서 읽기에 도전하는 초보자라면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다.


[The book thief] by Markus Zusak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비극과 공포 속에서도 책에 대한 사랑으로 삶을 버텨나갈 수 있었던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읽는 내내 감동과 여운이 남았던 책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공감을 많이 했던 책이다. 상처뿐인 환경에서 글로 치유 받았던 소녀가 여전히 내 앞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 것 같다.


[Thirteen Tale] by Diane Setterfield

이 책 역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만한 내용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와 독서광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출간한 13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책은 출간 즉시 회수되었지만 독서광은 그 책을 지켜냈다. 마지막 13번째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작가를 만나는 것이 책의 초반부이다. 상당히 흥미롭게 전개되는 스토리 때문에 단번에 읽었던 책이다.


[Angela’s Ashes] by Frank McCourt

내 얘기를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해 듣는 것 같은 책이었다. 빈곤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묘사한 책이다. 이야기의 시점이 어린 아이였다는 점에서도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책이었다.


[Things fall apart] by Chinua Achebe

서구 세력에 의해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아프리카의 한 부족이 몰락하는 과정을 묘사한 소설이다. 특히 평소에 접하기 힘든 아프리카 부족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서구 세력에 맞서 싸워보지만 결국 백인의 교회를 중심으로 문화, 문명이 아프리카 부족을 집어삼키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A long way gone] by Ishmael Beah

한 소년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 내려간 책이다. 평범한 소년은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가족과 헤어지고 살아남기 위해 소년병이 된다. 소년은 어느덧 전쟁의 한복판에서 가해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쟁으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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