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결정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을 특정 유형으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생각파와 행동파로 구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이 많은 사람과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사람으로 나눠볼 때 나는 후자 쪽이다. 내가 처음부터 행동파였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에는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국 어떤 말도 해보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으니 나의 성향은 생각파 쪽이었다. 하지만 25살 즈음을 기준으로 다시 태어난 나는 그냥 흘려보냈던 시간이 안타까워서인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선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어떤 결정을 하고 행동을 하기까지 왜 많은 생각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시도해보다가 어렵거나, 나와 맞지 않거나,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포기하면 그만이다. 포기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잃을 것은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깐의 시간과 조금의 에너지가 투입되었다면 그것이 아까워서 그만두는 것을 쉽게 하지 못한다. ‘조금만 더 노력해보자.’ ‘조금만 더 힘내보자.’ 라며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일을 질질 끌고 버텨낸다. 되돌아보면 참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단 한번뿐인 인생인데 무엇을 위해 정신적 고통을 인내하면서까지 참고 버텨야하는지.
몇 달 전에 토익 시험 점수가 곧 만료될 것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40이 훌쩍 넘은 나이까지도 토익 점수를 늘 갱신하는 내가 가끔 웃긴다. 주위에서는 이제 토익 점수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무엇을 위해 아직도 토익 시험을 보는지 묻는 사람이 많다. 매번 묻는 사람들의 질문이 귀찮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말이 옳기도 했다. 이직을 위해서는 더 이상 토익 점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한 용도를 위해 토익 시험 점수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2년에 한번씩 토익 시험 점수를 갱신해오고 있다. 이것은 나만의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나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했던 영어 공부였지만 한국에서는 영어를 사용할 상황이 5%도 발생하지 않는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다. ‘Use it, or Lose it’ 사용하지 않으면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오랫동안 영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영어가 체화되어 있더라도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토익이었던 것 같다. 최소한 2년에 한번은 단 한달이도 영어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은 의외의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현재의 외국계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5번의 영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때 당시에도 토익 점수가 곧 만료될 것이라는 문자를 받고 다급하게 영어 공부를 시작한지 보름정도 지났을 때였다. 서류 전형에는 합격했지만 곧 인터뷰를 진행할 텐데 영어가 가능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영어가 가능해야 한다는 의미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던 터라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나에게 전화를 주었던 리크루터는 나와 함께 일하게 될 팀이 모두 외국인이기 때문에 영어가 필수라는 의미였지만, 내가 가능하다고 답변한 의미는 ‘가끔, 종종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있다면 그 정도의 회화는 가능하다’ 였다. 바로 다음주에 영어 인터뷰 일정이 잡혔다. 이때 내가 했던 인터뷰 준비는(영어 관련한 준비) 오직 토익 공부였다. 인터뷰 일정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고 눈으로만 풀었던 문제를 입으로 읽으면서 풀었다는 점만 달랐다. 의외로 영어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에는 내가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합격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착각이었다. 팀에 합류하고 매일 진행되는 회의를 통해 알게 되었다.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영어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인터뷰 과정에서 내가 외국인임을 배려하여 일부로 말을 느리게 했다는 것을. 이미 팀에 합류한 현재는 더 이상의 배려는 없다. 이제 생존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끔 토익 시험이 취업을 위한 형식적인 절차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일에서 몇 달만 공부하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력서에 한줄 써넣기에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친구들에게 고득점의 토익 점수는 필수 조건과도 같다. 대부분의 기업은 경력 직원 채용과는 다르게 신입 직원 채용시에는 토익 점수를 묻는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크고 작은 기업에서 17년 넘게 일해왔지만 영어를 사용할 상황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토익 점수를 묻는 이유는 진짜 영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소양을 묻고 싶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정말 영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 역시 토익 점수를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할 수 있는 좋은 무기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렇게 시작한 토익 공부였지만 입으로 읽으면서 공부했던 토익은 점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토익 시험에 출제되는 문장들은 비즈니스 영어로서 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다. 결국 나는 토익을 점수가 아닌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용도로 전략을 바꿨다. 이제는 토익 지문을 읽고 문제는 푸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를 이해하고 읽고 암기하려고 노력한다.
5년 넘게 영어 회화 학원을 다녔고 그 결과 더 이상 올라갈 레벨이 없었지만 영어에 대한 갈증은 더 커져갔다. 또 한편으로는 현재의 영어 실력으로 외국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한지도 테스트하고 싶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은 회사에서 만난 두 사람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동갑인 친구였다. 친구는 어학연수를 영국으로 다녀왔다고 했다. 늘 그때가 그립다며 영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종종 이야기해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 역시도 영국의 어느 한 지역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였던 것일까? 단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되었다. 나 역시도 친구가 얘기해주었던 그 지역에 직접 가서 살고 싶어 졌다. 결국 외국에 살고 싶다는 욕망은 눈덩이처럼 커지더니 나를 실행에 옮기도록 부추겼다.
어느 날 회사에는 프리랜서라며 키 큰 여자 한 분이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셨다. 너무 화려한 외모는 거부감을 갖게 했다. 회사에서서는 프리랜서를 채용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디자이너라는 업무 특성상 예외적으로 채용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회사 직원의 추천이 있었고 정직원보다 급여도 적었기 때문에 회사와 프리랜서 모두 손해볼 것이 없는 계약이었다. 그녀를 위한 환영식때 나는 그녀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스스럼없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녀가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곧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은 꼭 여장부 같았지만 액세서리나 옷차림은 굉장히 화려했다. 하지만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그녀의 환경이었다. 현재 영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가족을 보기 위해 잠시 한국에 다니러 온 것이라고 했다. 한달 후에 영국으로 돌아가지만 그 전까지는 일주일에 3일 정도 회사에 출근하겠다는 말도 전했다. 이후 그녀가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영국에 거주하는 그녀가 무척 부러웠지만 그녀는 한국이 좋다고 했다. 남편이 한국에서의 삶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국으로의 유학을 선택했었고 졸업 이후 취업에 성공하여 여전히 영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녀의 삶에 간섭할 수 없을 것 같은 자유로움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였지만 모든 것을 희생할 만큼 남편이 좋았던 것 같다. 그녀의 남편은 영국에서의 생활에 상당히 만족해 했지만 그녀는 달랐다. 이미 꽤 오랜 시간 영국에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할 줄 몰랐고(내가 보기에는 노력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그곳의 날씨가 싫다고 했다. 아마도 의사소통 문제가 가장 컸을 것이다. 남편이 출근하면 하루 종일 집에서 일을 하거나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조금은 안스럽다는 생각도 했다.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혼자 보낼 시간들이 싫었던지 나에게 영국에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저렴한 비용으로 그녀의 집에서 홈스테이하는 것도 고려해보라고도 했다. 특히 그녀가 거주하는 에든버러는 아시아인들 특히 한국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영어 공부에 최적의 장소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설득력 있게 나에게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영국으로 돌아가는 그녀와 함께 비행기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녀의 연락처와 개인 메일 주소를 받았다. 그리고 그 주 휴가를 내고 유학원을 방문하였다. 내 인생에서 어학연수를 가겠다는 것은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동안 벌어 두었던 돈을 모두 사용해야 했고, 직장도 그만두어야 했다.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직장 문제는 달랐다. 이미 첫번째 직장에서 해고된 이후였기 때문에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하나씩 문제들을 처리해나갔다. 유학원을 통해 학원을 등록했고 비행편을 예약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말씀드렸고 다음날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부모님은 많이 반대하셨다. 국내도 여행한번 다녀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외국을 가겠다는 것이냐고 걱정이 많으셨다. 사직서를 제출했던 회사는 의외의 제안을 해주었다. 어학연수 기간동안 휴직처리를 해줄 것이며, 그 기간동안 돈이 필요할테니 하루 2시간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동안 받았던 전체 급여를 줄 수는 없지만 20%는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고 드디어 8개월간의 어학연수를 위한 비행기에 탑승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탔던 비행기가 혼자 떠나는 어학연수라니. 그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중간 경유 없이 13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불편하긴 했지만 기분 좋은 긴장감이 계속되었다. 비행기 안에는 약 60%가 외국인이었고 40%가 한국인이었다. 승무원들도 모두 외국인들이었다. 학원에서 만났던 외국인 선생님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외국인과 대화를 했던 것이다. 간단한 질문에도 신이 났다. 13시간 후 비행기에서 내려 커다란 이민 가방을 기다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들의 짐을 찾아 목적지로 이동했지만 나는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내 짐을 기다렸다. 어쩔 수 없이 눈앞에 보이는 데스크로 가서 내 가방이 보이지 않으니 찾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덩치가 큰 험상궂게 생긴 백인이었다. 가방의 무게와 생김새를 묻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5분 정도 지나자 내 가방이 현재 다른 나라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착오로 발생한 문제이니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면 짐을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하..외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렇게 문제가 많을 일인가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빈손으로 택시를 탔다. 20분쯤 택시를 탔던 것 같은데 그 시간동안 택시기사 아저씨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영국은 처음이냐, 어느 나라에서 왔냐, 지나가는 이 길은 경치가 좋으니 꼭 시간내서 여행해봐라 등등. 영국인들이 원래 이렇게 친절하였었나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내가 묵을 디자이너의 집에 도착했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도착한 첫날 예상하지 못한 룸메이트를 만나게 되었다. 디자이너 언니는 남편과 둘이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 나 외에도 홈스테이를 하는 사람이 두명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한 명과 한 방을 사용해야 했고 다른 한 명은 별도의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았다는 생각이든다. 지리도 잘 몰랐고 그때 역시도 사교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친구 사귀는 것이 어려웠다. 독방을 썼던 친구는 디자이너 언니의 남편과 같은 학교를 졸업해서 호텔에서 일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한국인 같았지만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나도 영국을 공부가 아닌 일을 위해 간 것이라면 절대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에서의 삶은 자유 그 자체였다. 영국에 거주하는 동안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자유로움을 느꼈던 것일까? 나를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져서 자유를 느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는 원래부터 자유로웠던 사람이었던 것일까? 종종 어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롯이 나의 삶에서 현재에 집중했던 기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현재를 살고 있지 않다. 어렸을 때에는 과거에 묶여 살았고 현재는 미래에 묶여 살고 있다. 회사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순간을 위해 어제를 살았고 오늘도 살고 있다. 즉 나에게 현재가 있었던 순간은 영국에서의 삶 뿐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미래를 위해 살아왔으니 나의 미래는 찬란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언제나 초라했다. 그래서 나 역시 영국에 오래도록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절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에 도착하고 몇일 후 학원 일정이 시작되었다. 역시 동일하게 레벨테스트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다지 높은 레벨을 받지는 못했다. 전체 7개의 레벨 중 5번째 레벨의 반으로 배정받았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레벨만 수강했던터라 5번째 레벨을 배정받았다는 것이 내심 불쾌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배정받은 반으로 향했다. 같은반 친구들은 대부분 프랑스나 독일과 같이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었고 간혹 일본과 중국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독일인들의 영어가 가장 유창했다. 그들이 영어를 습득하는 속도나 발음은 월등했다.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을 영어권 국가에서 온 사람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수업은 꽤 길었다. 우리나라에서 진행했던 1시간짜리 수업이 아닌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되는 영어 수업이었다. 단순히 영어를 배우러 오는 곳이기보다 더 장기적인 목적, 예를 들어 학교에 진학하거나 취업을 위한 목적을 위해 공부하러 오는 곳 같았다. 수업은 오후 3시까지 진행되었는데 수업이 끝날 즈음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두웠다. 영국의 날씨는 최악이다. 일주일에 3~4일은 안개비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햇빛이 쨍쨍한 날이면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일괄욕을 즐긴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햇빛을 보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다면 지금의 영국이 존재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국의 날씨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나 역시 날씨 좋은 날이면 학원 수업을 빼먹고 공원에 앉아 책을 읽곤 했다. 딱히 햇빛이 그리웠던 것은 아니지만 다들 그러니 나도 그래보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주말이면 같이 살고 있는 동생들과 여행을 다녔다. 가까운 거리는 버스를 이용했고 조금 먼 거리는 기차를 이용했다. 동생들 덕분에 인근 지역은 거의 여행을 해봤다. 그때 당시 에든버러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많지 않았다. 지금이야 에든버러 축제가 널리 알려지면서 해마다 에든버러를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때는 어디로 여행을 가던지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좋았다. 경치는 아름다웠고 주위는 조용했으며 마음은 편안했고 풍요로웠다. 살면서 이런 호사를 누려도될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가끔 지나가는 현지인들이 건네는 ‘Hello’도 정겨웠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머니, 젊은 부부와 그들의 아이들,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 모두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나는 지금도 그때 사진을 가지고 있지만 자주 보는 편은 아니다. 그때의 사진을 볼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그 짧았던 날들이 그립다. 그때의 경치가, 함께 했던 사람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립다.
영국은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다. 우리나라 길거리 음식처럼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이 있는데 그 유명한 피시앤칩스이다(최소한 영국에서는 유명하다). 나 역시 같이 살았던 동생들 덕분에 처음 먹어보게 되었다. 운동화를 튀겨도 맛있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튀김은 실패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피시앤칩스도 마찬가지이다. 생선과 감자를 기름에 튀겨서 작은 종이 상자에 담아 판다. 식당 안에서 먹어도 되지만 대부분은 종이 상자와 포크를 챙겨서 주위 공원에서 먹는다. 외국 음식이 많이 들어와 있는 우리나라에서 왜 유독 피시앤칩스가 눈에 보이지 않는지 의아하다. 혹은 이미 누군가 들여와서 팔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이 풍부한 우리나라에서 그런 흔한 맛을 좋아할 리가 없을 테니. 우리나라에서 피시앤칩스를 먹는 다는 것은 음식 맛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추억을 먹고 싶기에 피시앤칩스를 찾는 것일 것이다.
또 어떤 날은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날씨가 좋은 날이건 나쁜 날이건 영국의 가을과 겨울은 해가 짧기 때문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 가능한 많은 것들을 해야 한다. 공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수다라도 떠는 날에는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것도 아쉬운데 해는 왜 그리도 짧은 것인지. 매 순간이 아쉬웠다.
학원에서 나는 의외로 인기가 좋았다. 유럽에서만 생활했던 대부분의 남자들은 동양에서 온 여자가 새로웠을 것이다. 영어 수업 특성상 두 명 혹은 3명 이상이 그룹을 지어 상황극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남자들은 나와 짝을 하고 싶어했다. 남자라고 해봐야 대부분은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흥미로운 존재였다. 물론 젊고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다. 어느날 독일인 친구가 동거를 하자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이다. 단 한번도 개방적인 환경에 놓여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개방적인 삶이 부담스럽기까지 했던 때였다. 동거를 제안한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왜 나와 살고 싶냐고, 나를 잘 알지 못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의 짧은 답변은 나를 당혹케 했으면서도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니가 좋으니까 같이 살려는 거지, 그리고 살면서 알아가면 되는 것 아냐?’ 와우..이렇게 쉽게 대답을 하면 더 이상 할말이 없는데. 상당히 논리적이지만 받아들이기는 힘든 답변이었다. 지금은 동거 문화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살다가 이혼할거라면 결혼이라는 절차가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다. 같이 살아보고 생각과 가치관이 맞으면 계속 같이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헤어지면 될 일이다.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그때 당시는 동거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조차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개인적으로 ‘what if’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때 만약 이런 행동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말에는 지나온 과거에 대한 후회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에서의 모든 일에는 ‘what if’가 따라붙는다. 그때 만약 거기서 공부를 계속 했다면, 만약 거기서 취업을 하려고 노력했다면, 만역 동거라는 것을 해봤다면. 지금 내 삶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더 자유로워졌을까? 더 불안해진 삶이었을까? 누구나 가보지 않은 삶에 대한 동경이 있다. 나에게는 영국에서의 삶이 그렇다.
영국은 문화의 나라이기도 하다. 내가 영국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든버러 축제가 시작되었다. 작은 천막을 치고 한두 사람이 연극을 하는 곳이 많았다. 나 역시 세익스피어의 햄릿이라는 연극을 관람했다. 연극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단 한번도 다른 사람들의 웃음 포인트를 따라갈 수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왜 웃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돈만 날렸다는 속상함이 있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새로운 경험은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언제 또다시 1인 연극을 볼 기회가 있을까, 그것도 세익스피어라는 작가의 나라에서.
몇 달 후에는 테어나서 처음으로 뮤지컬이라는 것을 관람했다. 디자이너 언니 부부와 함께 캣츠라는 뮤지컬을 관람했는데 돈이 아깝지 않았다. 고양이 모양으로 변신한 배우들이 노래하며 춤을 출 때에는 마치 정글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노래가 고조될 때에는 나 자신도 한껏 흥에 겨워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문화 생활을 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작게나마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깟 돈이 중요할까 싶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문화생활은 계속 하려고 노력했다. 영화, 연극, 뮤지컬, 그리고 그림 감상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하면서 살아왔다. 문화생활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단지 나에게는 현실의 고단한 삶을 잠시라도 잊고 다른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휴식 같은 것이다. 요즈음 같이 바쁜 일상이 지속되면 책과 문화생활도 멀리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의 자양분을 갉아먹으면서 사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내면의 자양분을 갉아먹고 그것도 부족하면 미래의 자양분을 미리 당겨서 쓰는 기분이다. 아무리 바빠도 나를 채워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새겨본다.
연극과 뮤지컬로 영어에 대한 좌절이 있었지만 곧 또다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나와 같은 방을 사용했던 룸메이트 동생은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같은 학원을 다녔지만 매우 낮은 레벨의 그녀는 행정적인 처리가 필요할 때마다 언어의 장벽을 겪어야 했다. 어느 날은 본인의 행정처리를 위해 학원 관리자를 함께 만나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룸메이트 동생 역시 영어 때문에 그동안 많은 무시를 받아왔다고 했다.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아왔기 때문에 또다시 혼자 관리자를 만나는 것이 두렵다며 함께 가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 역시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룸메이트 동생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함께 가는 것이 좋을 듯하여 동행하였다. 관리자와 룸메이트 동생의 문제에 대해 얘기한 후 큰 문제없이 행정적인 문제가 처리되었다. 룸메이트 동생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예정보다 일찍 한국에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학비는 미리 선불로 지불하였기 때문에 이후 수업비용에 대해 환불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학원은 별 문제없이 환불조치를 해주겠다고 했다(물론 전액 환불은 아니었다). 룸메이트 동생의 말만 듣고 관리자가 불친절할 것이라고 기대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관리자는 친절했고 동생이 빨리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룸메이트 동생이 느낀 관리자의 무례함은 아마도 언어의 장벽에서 기인한 서로의 오해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언어의 장벽이었던 자신 만의 오해였던 룸메이트 동생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누군가의 일을 대신 처리해줄 정도로 영어가 많이 향상되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결국 룸메이트 동생은 몇일 후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넓은 방을 혼자 사용하려니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이후에는 학교 친구들과 더 어울려 지냈다. 하루는 프랑스 친구와 쇼핑을 하고 다음날은 일본인 친구와 점심을 먹는 등 다양한 국가의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나의 가치관과 생각이 많이 유연해졌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생각을 바꾸지 않았지만 다양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생각과 나의 생각에 대해 토론하면서 서로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누가 틀린 것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더 좋은 생각을 찾아가는 과정이 즐거웠고 그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이 성장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한국에 돌아올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돈을 털어서 가족들 선물을 사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짐을 싸고,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왜 그리도 눈물이 나던지. 택시 기사님은 나에게 나쁜 일이 있냐고 물었다. 돌아가는 것이 서운해서 그렇다고 하니 다시 오면 될 것을 왜 그리 우느냐는 것이다. 아마 나는 그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오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영국이라는 나라는 여행의 대상이고 싶지 않다. 한참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남겨두고 싶다. 나중에 은퇴 후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된다면 단 3개월 만이라도 다시 살아보고 싶다. 그때도 예전과 같은 자유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다음은 데이비디 M번스가 했던 말이다. 전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틀릴 수 있는 기회를 절대 포기하지 말라.
그러면 삶에서 새로운 것을 배워
전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