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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솔 Jan 18. 2021

[이론] '가시적 인간'과 '몸짓 언어'

벨라 발라즈의 형식주의 영화 미학



벨라 발라즈(1884-1949)



가이드를 시작하며

고전영화미학은 크게 형식주의와 사실주의 두 줄기로 양분된다. 그중에서도 1920년대부터 30년대는 형식주의가 헤게모니를 잡았던 시기이다. 형식주의자들의 이론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다양한 이론들을 관통하는 형식주의의 특성은 바로 '예술이란 현실을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헝가리의 영화 비평가 벨라 발라즈(Béla Balázs) 또한 형식주의 이론을 펼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저술 <영화 이론>(Theory of the film)을 토대로 주장의 핵심을 살펴보자.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어떤 방식으로 영화의 예술성을 옹호했는가'이다. 가이드를 시작하겠다.







몸짓 언어의 부상

발라즈가 논의를 펼쳤던 당시는 1920년대, 그러니까 무성영화의 황금기였다. 당시 영화는 대사 소리도, 색채도 없는 영화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발라즈가 주목한 영화의 예술성은 그 '몸짓 언어'에 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행동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배우들의 표정 연기로 정서가 표상된다. 이러한 몸짓 언어를 '영화가 이끌어낸 형식 언어(formal language)'로 여긴 그는, 영화로 인해 인간의 문화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기술한다.

아주 오래전,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선사 시대에 인간의 문화는 -시각 문화-였다. 여기에서 시각의 대상은 몸짓이다. 몸짓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주된 소통 수단이었던 것이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인간의 문화는 -개념 문화-로 들어서게 된다. 문자가 음성으로 흩어지건, 종이에 적히건 어쨌거나 추상적인 언어임은 분명하다. 종이에 적힌 문자가 시각의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시각은 추상을 향한 감각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몸짓 언어가 아닌 '문자 언어'로 드러내게 된다. 각기 다른 분노의 표정이 '나 화났어'라는 획일화된 표현 방식으로 교체된 것이다. 물론 문자 언어의 등장으로 몸짓 언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위상이 격하되었을 뿐. 그런데, 무성 영화는 몸짓 언어를 다시금 주된 소통 수단으로 끌어올린다. 무성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면밀히 살펴 그들의 감정과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발라즈는 이를 -몸짓 언어의 부상-이자 새로운 -시각 문화-로 보았으며,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개별적이고 사적인 표현으로서 '몸짓 언어'가 중요한 시각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복권된 것이다.

발라즈는 문자언어와 몸짓 언어가 모두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각기 다른 내면을 표현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문자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제한하는 틀'인 반면 몸짓 언어는 '정서의 촉발자'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 타당한 지적인데, 문자언어는 경험을 표현하는 데 한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경험과 감정들이 '아프다'라는 말로 환원된다. 우리는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경험할 수 있지만 영어권 화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소복소복'이라는 문자적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하늘의 색은 '까만색, 남색, 회색, 하늘색' 정도로 구별되어 경험되지만, 이누이트는 수백 가지의 하늘색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기반으로 서로 다른 색을 명료히 지칭하며 경험한다. 인간의 언어는 이러한 점에서 경험의 한계로 작용한다. 한편, 몸짓 언어는 정서의 촉발자라고 볼 수 있는데, '말초 신경 이론'의 논의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말초 신경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슬프기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요컨대, 문자언어와는 다른 힘을 가진 몸짓 언어가 무성영화를 통해 다시 부상했다.






대중예술로서 영화와 가시적 인간의 출현

몸짓 언어는 개인별로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인다. 기쁠 때 웃는 것이 보통이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까. 슬픔의 눈물과 환희의 눈물 사이, 그 미묘한 차이를 살피기 위해 관객은 몸짓 언어에 집중한다. 그런데, 개별적이고 사적인 이 몸짓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세계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다. 문자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몸짓 언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 반대편의 이름도, 국적도 모르는 사람들의 눈물에 마음이 아려올 수 있는 셈이다.

발라즈는 영화가 대중예술임을 언급하면서, 대중(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지각 양태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영화는 대중의 지각 양태를 반영한다'는 벤야민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셈.) 또한 몸짓 언어의 보편성을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한다면 대중예술로서의 보편적 성공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무성 영화화의 흥행을 기반으로 '인간이 가시적인 몸짓 언어에 주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라즈의 표현에 따르면 "가시적 인간의 출현"이다.







영화의 제작 과정에 따른 영화의 예술성

발라즈는 영화의 제작 과정을 4가지 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별로 예술적 특성을 지적하였다.


영화 제작 단계와 발라즈가 주목한 단계별 특성


첫 번째 단계는 카메라 앞, 현실의 배열이다. 공간과 소도구의 배치, 조명의 활용을 통해 미장센을 구성하고, 배우들의 몸짓 언어가 펼쳐진다. 이렇게 구성된 현실이 카메라에 담긴다. 촬영 단계에서는 카메라의 창조적 힘이 발휘된다. 카메라가 -창조적인 힘-을 지니는 이유는, 카메라가 대상과의 거리, 공간을 담는 앵글 등을 달리 하면서 "같은 대상을 다른 모습으로 표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창조적 카메라에 대한 논의가 발라즈의 미학을 '형식주의' 선상에 놓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창조적 카메라에 따라, 현실은 수천 가지의 모습으로 담길 수 있으며, 이러한 논의는 현실의 변형을 전제하기에 형식주의적이다.

또한, 발라즈는 창조적 카메라의 특정 기법들이 관객의 동일시를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관객은 영화를 볼 때 인물의 시선으로 빨려 들어가, 특정 인물의 시선으로 작품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기존의 유럽 미학에서 통념으로 여겨지던 '소우주의 원리'에 부응하지 않는 설명이다. 소우주의 원리는 '작품을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세계로 간주하고 멀찍이서 관조하는 것'이다. 예컨대 회화 작품을 바라볼 때 관객은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그 작품을 하나의 독자적이고 충만한 세계로서 바라본다. 그런데 관객은 영화를 하나의 자족적인 소우주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 동일시 기법에 의해 작품 속으로 들어가 인물의 시선을 취하도록 유도된다. 



창조적 카메라, 클로즈업_<잔다르크의 수난> 중


창조적 카메라는 앞서 말하였듯 -카메라의 거리와 앵글-을 조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창조적 카메라의 예시가 "클로즈업"이다. 대부분이 클로즈업으로 전개되는 <잔다르크의 수난>(1928)을 예시로 들고 있는데, 발라즈의 표현에 따르면 클로즈업은 "미세한 대상에 감춰진 세계를 드러낸다." 즉, 클로즈업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미시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인간의 표정까지도 아주 면밀히 볼 수 있다. 발라즈는 인물의 표정 클로즈업을 찬미하면서, 이것이 이목구비의 유희를 느끼게 해 주고 표정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다양한 영혼(내면)을 살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형식주의가 세계를 변형시키는 아름다움에 주목했다면 사실주의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취하는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발라즈의 클로즈업 논의는 이러한 점에서 다소 사실주의적으로 여겨진다.)

세 번째, 편집 단계에서는 '몽타주'에 주목한다. 몽타주 montage는 넓은 의미로는 '쇼트를 이어 붙이는 편집', 좁은 의미로는 '특정한 목적과 기능을 부여받은 몽타주'(견인 몽타주, 연상 몽타주 등)를 뜻한다. 발라즈가 지칭한 montage는 넓은 의미의 몽타주이며, 쇼트들의 배열을 통해 개별 쇼트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지적하였다. 특정한 의도에 따라, 특정한 효과를 목적으로 쇼트들이 배열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사 단계에서는 관객이 편집된 이미지들을 접하면서 동일시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전체를 발라즈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현실의 이미지와 촬영된 이미지, 영사되는 이미지 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즉, 영화는 "변형의 이중"이다. 현실 이미지가 촬영을 통해 변형되고, 촬영 이미지가 편집을 통해 변형된다. 그렇게 영사되는 이미지는 두 번의 변형을 거친다.


 




객관적인 주관주의로서 영화

발라즈는 예술을 "객관과 주관의 종합"이라고 정의 내렸다. -객관적인 현실의 조각을 예술가의 주관으로 가공하는 것-이 곧 예술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란 현실을 예술가의 관점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같은 대상일지라도 예술가만의 고유한 관점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는 창조적 카메라의 힘을 발휘하고 편집을 거쳐 현실을 변형시키는 예술이다.

발라즈는 나아가, 영화가 "객관적인 주관주의"라는 특성을 보인다고 말한다. 객관적인 주관주의는 '인물의 시점으로, 주관으로 범벅된 세계를 관객으로 하여금 객관적 세계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는, 인물의 시점이 반영된 그 세계를 관객은 관조적으로 볼뿐만 아니라 인물과 동일시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는 기존의 예술과 구별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가이드를 마치며

지금까지 발라즈의 영화 미학을 가볍게 살펴보았다. 요점은 무성영화가 일깨운 몸짓 언어의 가능성과 중요성, 그리고 창조적 카메라의 힘이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영화의 예술성을 어떻게 지지할 것인가. 영화만이 호소하는 예술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영화에 대하여 진지하게 사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다음 '이론'은 형식주의의 또 다른 대표주자, 루돌프 아른하임이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이만 가이드를 마친다.



-정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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