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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솔 Apr 10. 2023

[영화리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1988)

왓챠에서 보는, 스페인 영화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욕망' 첫 번째


가이드를 시작하며


할리우드 영화문법을 따르는 오늘날의 몇몇 작품은 아직까지도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그리는 고착적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스페인 영화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에서 여성을 욕망의 주체로 그리면서 응시의 주체와 대상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을 부수는 데 앞장섰다. 

스페인 현대영화하면 빼놓을 수 없는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 1949-)는 스페인 뉴웨이브의 선봉자로 꼽힌다. 10대 후반부터 70-80년대 젊은 세대의 저항문화 "모비다(La Movida)"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정체성의 제한적 규정성을 거부했다. 록 그룹을 결성한 그는 짧은 치마에 장모 가발을 쓰고 파격적인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격식을 차리는 일보다도 '자유'를 사랑한 그가 만들어낸 작품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욕망을 시각화하는 방식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욕망을 지닌 인물들이 경험하는 욕망의 좌절과 대체, 성취를 강렬한 원색의 미장센과 빠른 편집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Mujeres al borde de un ataque de nervios, 1988)이라는 작품명이 가리키는 인물들은 모두 욕망을 지닌 주체로, 좁게는 3명; 카사노바 이반(에두아르도 칼보)의 애정을 갈구하는 페파(카르멘 마우라)와 루시아(줄리에타 세라노), 시아파 테러리스트와 엮인 칸델라(마리아 바란코)-를, 넓게는 잠재적 신경 쇠약자 마리사(로시 드 팔마)와 파울리나(키티 맨버)를 포함한다.


왼쪽부터 칸델라, 마리사, 루시아, 페파. 참고로 극 중 네 사람이 이렇게 다정히 앉아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첫 시퀀스는 인물들의 욕망이 향하는 대상인 이반을 보여준다. 이반이 성우로서 일하는 장면이 독특하게 연출되었는데, 길을 거닐며 마주치는 모든 여성에게 사랑의 대사를 뱉는 그를 카메라가 측면에서 따라간다. 이내 흑백 장면은 이반의 입술 클로즈업으로 전환된다. 해당 시퀀스는 이반이 성우 일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편, 이반의 난잡한 애정 관계를 드러내는 재치 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영화는 욕망을 핵심 테제로 삼기에 이 장면 외에도 많은 장면들이 인물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내러티브를 가진 모든 영화에서, 인물들은 어떤 종류든 저마다의 욕망을 지닌다. 욕망은 인물이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이 때문에 인물들의 욕망은 서사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욕망이 충돌하면 갈등이, 욕망이 합치하면 평화적 동행이 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들은 욕망이 좌절된 상황에 처해 있다. 그 결과가 바로 '신경쇠약 직전'이다.


영화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페파는 이반과 일주일 전 헤어지고부터 이반과의 대화를 간절히 욕망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오는 모든 알림을 이반의 기척으로 여긴다.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신경이 곤두선 탓에 수면제를 복용해야만 잘 수 있다. 그런 그녀의 상태는 붉은색 소품을 곳곳에 배치한 미장센과 빠른 편집을 통해 부각된다. 일례로, 토마토를 손질해 가스파초를 만드는 신에서 페파의 의상은 빨간색이며, 그녀가 새빨간 토마토를 손질하는 장면 클로즈업으로 전환되면서 붉은색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녀가 칼질로 손을 다칠 때는 피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투우사가 붉은 천으로 소를 자극해 달려들게 하는 것처럼, 현재 페파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 의해 신경을 자극받고 있으며 그 시각화가 붉은색으로 점철된 미장센으로 이루어진다. 화병, 벽지, 소파, 수화기까지 많은 소품이 붉은색이며, 붉은 이미지들을 빠르게 연결하는 편집은 페파의 곤두선 신경과 조응한다. 나아가 붉은색 미장센과 빠른 숏 전환은 관객의 정신 또한 자극한다.


연인의 연락두절에 이어, 침실 화재까지 겪는 페파. 붉은색이 곳곳에 배치된 미장센이 신경쇠약 직전으로 치닫는 그의 상황과 잘 조응한다.


한편, 칸델라는 ‘나약한 정신’의 표본으로 걱정이 많고 마음이 여리며 순진하다. 칸델라의 첫 등장은 페파에게 일종의 ‘방해’로서 연출된다. 칸델라의 연락은 현재의 페파에게 불필요하며, 이반의 연락을 기다리는 페파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칸델라의 호소는 페파에게 공허한 외침이 되고, 그녀가 의도치 않게 자살소동을 벌이고서야 그 외침은 유효해진다. 칸델라를 둘러싼 인물들의 태도를 볼 때 작품 속 ‘연대’는 ‘욕망’을 동반한다. 칸델라와 페파를 돕는 카를로스(안토니오 반데라스)는 그들에게 키스를 갈구하고, 페파는 칸델라를 돕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가는 순간에도 이반을 찾고자 하는 제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 욕망은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원동력처럼 보인다. 


나약한 정신의 칸델라를 안심시키는 이반의 아들 카를로스


같은 맥락에서 루시아는 이반을 향한 욕망이 극에 달해 그를 죽여야만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지경에 이른다. 미련, 집착이라는 욕망은 이반을 살해하려는 동기가 된다. 


이반을 총으로 쏴 죽이려는 아내 루시아(이반의 모)


마지막 시퀀스에서 페파의 태도는 루시아와 다르다. 페파는 루시아처럼 광적인 집착으로 나아가지 않고 끝까지 그를 인간으로서 대한다. 페파가 이반의 제안을 거절하고 돌아서는 모습은 그녀의 욕망이 비로소 다른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난장판이 된 집안이 부감 풀숏으로 보인다. 페파는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며 일찍이 잠든 마리사를 살피는데, 욕망을 억압하며 살아온 처녀 마리사는 꿈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욕망의 주체로서 눈을 뜨게 된다. 

꿈에서 성적 희열을 느끼는 마리사. 칸델라와 이반(마리사의 약혼남)이 이를 지켜본다.


페파는 욕망의 주체로서 고난을 맞이할 마리사에게 임신 소식을 덤덤히 알리고, 두 사람은 초반과 달리 정이 담긴 대화를 나눈다. 욕망의 주체로서 번민의 삶을 사는 두 인간의 대화다. ‘처녀로서의 삶이 끔찍하다’라는 페파의 마지막 대사는 영화가 보여주는 욕망의 두 측면을 함축한다. 욕망은 이들을 날뛰게 한 번뇌의 근원이자, 삶의 주체로서 이들을 추동하는 힘이다.





가이드를 마치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이후로도 그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귀향>, <내가 사는 피부>, <패러렐 마더스> 등을 통해 여성을 주연으로 한 걸출한 작품들을 내놓는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여러 키워드가 있을 텐데, 이에 서울대 임호준 교수는 욕망, 도시, 여성, 동성애, 마약, 부조리한 유머, 스페인적 이미지 등을 꼽았다. 그 중에서도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은 '여성'과 '욕망'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자유롭고 깊숙한 고찰이 잘 담긴 작품이다. 해당 영화는 왓챠에서 볼 수 있다. 독자 여러분도 알모도바르의 자유롭고 강렬한 영화적 세계에 한 번쯤 방문해 보길 바란다.



정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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