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영화가 예술인가 아닌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히 예술인 영화는 1900년대 초만 해도 예술이 아니라 '오락거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뿌리는 대중 오락이었다. 시네마토그래프로 불리는 초창기 영화는 그 자체로 attraction, 볼거리였기 때문이다. 당시를 더듬어보면, 오늘날 우리가 게임을 예술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과 유사한 것 같다. 우리가 게임을 '예술'이 아니라 '오락'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영화도 그런 존재였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영화의 예술성'은 그 자체로 이론적 논의의 핵심이었다. 뮌스터베르크는 심리학적/미학적 성찰을 통해 영화의 예술성을 지지하였다. 그의 논의는 고전영화이론이 형식주의와 사실주의로 양분되었다고 볼 때 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논의는 형식주의로 분류되기 보다는 체계적 논의의 출발쯤으로 여겨진다.) 지금부터 뮌스터베르크가 어떻게 영화가 예술임을 주장했는지 살펴보자.
*논의의 재료는 뮌스터베르크의 저술_The Photoplay: A Psychological Study and Other Writings 이다.
정신의 매체, 영화
뮌스터베르크는 심리학자로서 영화를 심리학의 관점으로 고찰하였다. 그는 영화가 기존의 예술과 다른 점으로 정신작용과의 연관성을 꼽았는데, 특히 연극과 영화를 비교하면서 영화가 더 우월한 예술이라는 식의 논조를 띠었다. 당시 연극은 엄연히 예술의 한 범주였던 반면, 영화는 예술로서의 입지가 불분명했기에 다소 파격적인 주장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 1915)와 같은 내러티브 영화를 특히나 옹호했다. 단순한 현실의 기록보다도 허구 세계를 만들어내는 내러티브 영화에 주목한 것이다.
내러티브 영화를 옹호한 그는 영화를 '정신의 매체'로 정의 내린다. 이러한 정의를 두 가지 논의가 뒷받침하는데, 첫째로 그는 영화만의 형식 기법이 '인간의 정신작용을 모방한 기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영화가 다른 예술과 구별됨을 강조하였다. 둘째, 관객의 관람 경험에 주목하여, 영화가 관객의 정신작용을 통해 3차원의 깊이를 가진 연속적 이미지로 보인다고 지적하였다. 즉, 그는 영화에서 관객이 보는 것이 곧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정신작용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의 정신작용과 영화
뮌스터베르크는 영화 관람을 S-O-R(자극-반응 모형)의 틀에 비추어 심리학적으로 규명했다. '스크린 상의 평면 이미지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정서를 경험하는 것'으로 기술하면서, 영화 이미지를 '자극'으로, 관객을 '(자극에 반응하는) 유기체'로, 관객의 지각적 경험을 '반응'으로 간주한 것이다.
요지는 관람이 관객의 지각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뮌스터베르크는 영화 관람 시 벌어지는 정신작용을 저차원에서 고차원까지 나누어 언급하였다. 가장 저차원의 기본적인 정신작용은 '깊이와 운동의 지각'이다. 깊이의 지각에 대하여, 그는 관객이 지식에 근거해 영화 이미지가 주는 깊이감을 부정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이차원의 평면 이미지는 심리학적 요인(그림자, 앞의 물체와 뒷 물체의 겹침, 크기 차이, 움직임 등)으로 삼차원의 현실과 같은 깊이감을 가지는데, 관객은 스크린이 평면임을 떠올리면서 깊이감을 부정하는 것이다. 한편, 운동의 지각에 대하여 뮌스터베르크는 정지된 이미지의 나열을 관객이 정신작용을 통해 움직임으로 본다고 주장한다. 이는 가현운동(apparent movement)으로 설명된다. 즉, 정지된 이미지를 1초에 몇 프레임 이상 보여주면 마치 정지된 이미지들의 연속이 '움직임'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작용이 관객의 의식적 노력 하에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사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틀렸다고 밝혀졌다. '논의의 한계'에서 가볍게 살펴보자.)
지각보다 조금 더 고차원적인 정신작용으로는 '기억과 상상력'을 꼽았다. 그 위에는 '주의(attention)'가 있고, 가장 고차원적인 정신작용으로는 '정서의 경험'을 꼽혔다. 그는 정신작용을 모방하는 영화만의 기법으로 세상을 새롭게 제시한다고 생각했다.
가현운동의 사례. 정지된 그림 몇 장을 단지 연속적으로 볼 뿐인데, 우리는 이를 움직임으로 본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소행성38호')
정신작용을 모방한 영화 기법
뮌스터베르크는 '주의'를 모방한 기법으로 '클로즈업(C.U.)'을 가리켰다.디테일이 전체가 되고 나머지는 배제되는 클로즈업이 인간의 주의 작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작용을 모방한 기법을 옹호하면서, 영화의 예술성이 정신작용과의 관련 속에서 제고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기억'을 모방한 기법으로는 '플래시백(flash-back, cut-back)'이 꼽혔다. 시공간 상의 연관이 없는 두 공간(모티프)의 교차인 '평행편집'은 '상상력'을 모방한 기법인 셈이다. 끝으로, 가장 고차원적인 '정서'는 내러티브 영화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의 정서를 언급하면서, 사진극, 즉 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정서를 경험하게 만든다고 기술하였다. 그에게 정신작용을 모방한 기법은 다른 예술과 구별되는 영화만의 형식이다.
미학적 접근: 고립의 미학
그는 심리학뿐만 아니라 미학적 관점에서도 영화를 살폈다. 그는 예술의 목적이 '세계를 변형시켜 아름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더 많이 변형되어 현실과 거리를 둘수록 예술성이 커진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현실로부터 고립되는 것의 아름다움을 지적한 셈이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형식주의적 경향이 포착된다. 영화는 현실로부터 떨어져 그만의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소우주를 이루고 있으며, 관객은 현실로부터 떨어져나와 영화를 감상하고 내적 만족감을 얻는다. 연극에 비하자면 연극은 현실에 더욱 붙어있는 반면, 영화는 그 스스로도 현실로부터 떨어져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로부터 떨어져 감상하게 한다. 이렇게 보면 영화가 연극보다 정신의 세계에 더욱 가깝기 때문에, 그는 영화를 연극보다 우위에 있는 예술이라고 치켜세웠다.
논의의 한계
논의의 한계는 '깊이와 운동의 지각'에 대한 논의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영화만의 고유한 기법은 바로 정신작용을 모방한 기법이다.'라는 명제는 주장의 차원에서 인정될 여지가 있지만,'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깊이와 움직임은 관객의 정신작용의 산물이다.'라는 명제는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
우선 깊이에 대하여, 관객이 관람 중 스크린 이미지의 '실제적인 깊이감'을 '저건 이차원 평면 스크린이야'라는 생각으로 부정한다는 뮌스터베르크의 주장은 틀렸다. 오히려 관객은 영화 이미지가 평면임을 알면서도 실제적인 깊이감을 느낀다. 다만, 실제적인 깊이감을 느끼는 이유로 뮌스터베르크가 지적한 심리학적 요인들(대소 관계, 겹침, 그림자 등등)은 참이다. 도입은 맞지만 그 도입으로 이끌어낸 결론은 틀린 셈이다.
이는 운동의 지각을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관객의 정신작용을 통해 정지된 이미지들이 연속된 움직임으로 읽힌다고 보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정지된 움직임의 나열을 움직임으로 읽는 근거로 '가현 운동'은 사실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가현 운동은 인간의 시각적 '경향'이며, 그러한 경향을 활용해 영화 시스템(사진 이미지의 나열을 통한 움직임의 구현)이 이루어진 것일뿐이다. 우리가 의식적인 정신작용을 통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가이드를 마치며
우리는 이론의 첫 페이지를 휴고 뮌스터베르크의 논의로 채워보았다. 나는 과거 학자들의 논의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인간의 삶이 변화함에 따라 함께 변화하였고, 이에 따라 과거의 논의에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빈틈들이 생긴다. 그 빈틈은 점점 커질 것이다. 우리가 고전적인 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성찰의 재료이자 토대이다. 영화가 당연히도 예술인 오늘날, 우리는 이들의 논의를 보며 영화가 예술일 수 있는 이유를 한번쯤은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너무도 당연해 꺼내지 않은 질문들을 꺼내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당신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를 한번쯤은 떠올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