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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솔 Jan 06. 2021

[영화리뷰] 이터널 선샤인

기억의 세계와 망각에 대하여



 가이드를 시작하며

 2004년에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나는 코흘리개였다. 명작이라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바로 어제서야 보게 되었다. 영화는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열렬히 사랑해본 적 없는 나는 영화가 '기억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기억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을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작품의 특성이 바로 시공간의 변형이다. 시간과 공간을 기억과 망각의 과정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함을 살펴보자. 둘째로 장면화(mise-en-scene)의 여러 요소 차원에서 분석해보고자.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냈던 인물의 머리 스타일, 공간을 구성하는 소품들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지 살펴보자. 마지막으로는 영화의 모티프를 정리해본다. 씨네가이드를 통해 당신이 <이터널 선샤인>을 씹고, 뜯기고, 맛보고, 즐길 재료를 얻어가길 바란다.






 1. 시공간의 변형

 1) 서사_시간의 변형

 <이터널 선샤인>은 마음 놓고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물론, 뭐 본인이 아무 생각 없이 본다면야 할 말이 없지만, 비선형적인 기억들을 나름 순서대로 배치해나가며 볼 때 얻는 쾌감이 있다. 진정으로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생각을 잡아두어야 한다. 우리는 선형적인 서사에 더욱 익숙하기에 선형성을 기본값으로 두고 영화를 마주하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비선형적이다. 주인공 남녀의 만남과 연애, 이별, 재회 등의 사건이 뒤섞여있다. 시간의 순서는 처음부터 바뀌어 배열되므로, 관객은 극 초반부터 시간이라는 퍼즐을 짜 맞추게 된다.

 마치 '예술은 지각의 자동성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러시아 형식주의자(Russian Formalist)들의 주장을 실현하는 것만 같다. 일상에서 우리는 별다른 노력 없이 세상을 지각하지만, 예술은 일상과는 구분되는 노력을 통하여 진정으로 감각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러시아 형식주의 흐름에 따르면 영화예술은 대상을 '알기 쉽게' 재현할 게 아니라, 대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독특하게 담아내야 한다. 영화가 묘사하는 허구 세계는 '기억삭제'가 가능한 세계라는 점, 이 때문에 <이터널 선샤인>의 시공간은 구축되고 있다.


조엘(짐 캐리)의 기억 삭제 장면



 2) 서사_공간의 변형과 장면화_세팅

 러시아 형식주의에 따르면 내용은 형식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그릇, 내용=그릇에 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 통념과 반대되는 주장이다. 이 흐름을 일부 계승한 신형식주의자 데이비드 보드웰 또한 내용과 형식을 완전히 구분 짓지 않는다. 각 내용들은 각 기법들에 의해 가장 충실한 방식으로 구성되며, 이 요소들 간의 관계를 통틀어 '영화형식'이라 일컫는다. (형식에 관한 가이드의 시각은 추후 자세히 논의할 예정이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공간은 영화기법 차원에서, 동시에 서사 차원에서 역동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많은 특수 효과(visual effect)를 사용하여 기억의 세계를 현실과 달리 묘하게 흩트려 놓고 있으며, 사람의 얼굴 또한 변형되고 뭉개진다. 망각은 '기억 세계의 붕괴'로 시각화된다. 기억 삭제 작업을 거치며 기억 속 세계는 물리적으로 서서히 붕괴되는 모습을 보인다.

 극 초반부 조엘(짐 캐리)의 회상 장면은 현실세계와 기억(회상) 세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연출하여 인상적이다. 공간은 현실과 기억을 재배열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조직한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며 감상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특히, 영화는 '조엘의 기억 속 세계'와 '기억 삭제가 진행되는 현실 세계'를 교차편집하면서 독특한 효과를 창출한다. 인물의 목소리가 변형되고 공간 자체가 왜곡되는 '기억 세계'는 그 묘사 자체로 독특한 지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사진 출처_네이버 블로그

                   





 2. 장면화_의상 및 분장

 장면화(미장센)란 카메라 앞, 촬영될 대상의 모든 세부를 통제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연극에서 유래된 용어로,  연극에서 미장센은 '사건을 무대화하는 것'이지만, 영화에서는 '사건을 무대화하고, 무대화한 사건을 장면화하는 것'을 일컫는다. 무대화와 촬영을 포함하는 이중의 과정인 셈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장면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비선형적 서사를 시간 순서대로 짜 맞출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장면화 요소에서도 배우의 의상과 분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중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머리스타일은 결정적이다. 그녀는 염색을 자주 하는데, 이는 그녀의 '변덕스러운' 성격이라는 특성소(character traits)를 암시할 뿐만 아니라, 시기 구분의 단서로 기능한다. 초록색 머리, 붉은색 머리, 파란색 머리로 등장하는 그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퍼즐을 짜 맞추는 몫은 남겨두겠다.



이때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오렌지색.






 3. 모티프

 모티프란, '영화에서 의미 있는 반복'을 통칭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가이드는 이러한 모티프를 포착하였다.

1) 첫 번째 시퀀스의 반복. (영화가 퍼즐처럼 짜 맞춰지게 하는 핵심적인 부분. 같은 시공간이 반복되며, 그 반복 사이에 진행된 일들에 의해-신이 반복되며 다른 의미로 다가옴을 확인할 수 있다.)  

2)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자기소개 멘트가 반복됨.(첫 만남과 기억 삭제 후의 만남에서.)

3) ‘나오미’라는 전 여자 친구 이름 (서사의 시간 순서를 짜 맞출 수 있는 하나의 단서.)

4) 기억 세계 속, 기억삭제 회사 '라쿠나'를 찾아가는 신. (신이 반복되면서, 박사와 환자의 얼굴이 변형됨.)

이 외에도 많은 모티프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유사성과 반복'을 주요 원리로 하여 이야기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다른 모티프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며 즐거운 영화적 경험을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가이드를 마치며

 이제, <이터널 선샤인>을 즐겨보자. 모두 저마다 갖고는 있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기억 세계가 독특한 방식으로 구축된 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기억과 망각의 매커니즘을 영화적 세계로 구현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한 번 보고 또 봐도, 새로울 영화"다.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넌지시 묻거나, 당신이 마주했던 이별의 고통을 툭- 찔러 올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보는 당신에게, 이 작품은 사랑과 기억에 대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정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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