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보는 것도 괜찮아
손해를 보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특히 내가 얻을 수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하거나 포기를 한다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드문 일이다. 그래도 타인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거나 욕심을 내려놓으면 뭔가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생각에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기분도 좋아진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업무 유공 장관 표창을 선배에게 양보한 적이 있다. 당시 보직이나 업무 실적으로 보면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순리였다. 그러나 선배가 승진을 위해 점수를 받아야 하므로 양보를 청하였다. 잠시 고민도 하였으나 흔쾌히 양보했다. 선배는 장관 표창을 받았고 평정도 좋은 점수를 받았다. 손에 쥔 뭔가를 빼앗긴 것 같은 아쉬움도 있었으나 선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잘 한 결정이라 위안을 삼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무총리 표창 상신이 내려왔다. 이 상은 특정 업무에 한정되지 않고 직장생활 전반을 평가하여 선정을 하는 상이므로 근무기간이 많은 그 선배가 받아야 마땅한 상이었다. 그런데 결국 내가 받게 되었다. 선배의 경우 장관 표창을 받은 직후이므로 다시 국무총리 상을 추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연히 장관 표창을 양보했던 내가 추천이 되었고 이의 없이 상신이 되어 수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예견하거나 예상할 수는 없었으나, 양보를 하여 더 큰 상을 받게 된 것이다. 선배도 이런 상황을 잘 알기에 서운함 보다는 더 축하를 해주었으며, 나도 기분 좋게 받았었다.
사람은 한 치 앞을 알지 못한다. 지금의 손해가 엄청 큰 손해라 생각하여 절대 양보하지 않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서로 상처를 주게 되고 결국 좋았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물론 손에 쥔 것을 내어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잠시 이기심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면 그게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상황에 따라 손해를 감수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강릉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다. 전주에서 강릉은 시간으로 다섯 시간이 걸리고 고속도로만 해도 4개를 지나야 하는 먼 거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주에서 강릉까지 가서 근무한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곳으로 승진 발령이 났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강릉으로 가면 다시 전주로 오는 데 최소 2년 이상이 걸리게 된다. 이번 승진을 포기하여도 6개월 후엔 바로 승진을 하여 전주에서 가까운 곳에서 근무를 할 수 있으니 나에게는 더 이로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주에서 승진할 수 있는 자리가 하나 없어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전주에 있는 후배 한 명이 승진을 늦게 하게 되는 것이다. 고민 끝에 결국 강릉으로 갔다.
그 후 전주로 다시 오는데 3년이 걸렸다. 토요일에도 근무를 하던 시절이라 고생이 무척 많았다. 솔직히 후회도 했다. 그러나 그때의 결정은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강릉이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착한 친구를 얻기도 했다. 회사 생활에서도 두고두고 도움이 되었다. 그때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 모두 현재의 이익을 포기하여 더 큰 이득을 얻은 것이니 매우 운이 좋은 경우이다. 그러나 살면서 매번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익을 포기하면 그만큼의 손해가 발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익을 쫓아다니고 이익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럼 이익과 손해는 항상 반비례 관계인가? 이익과 손해라는 기준은 그 당시, 그 상황, 그 문제에 국한된 단면적인 평가이다. 그러므로 이를 벗어나 시공간적이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당시에는 이득이라고 생각된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손해가 되기도 하고, 그 상황에서는 이익처럼 보이다 가도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오히려 피해를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익이 손해가 될 수도 있고 손해가 이익이 되어 함께 공존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당장의 이익이 큰 의미가 없는 경우도 많다. 손해도 손해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길다.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행복한 일도 있고 불행한 일도 있다. 이득을 보는 경우도 있고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 일이고 무엇이 나쁜 일인지 잘 모르며 살아가고 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니 너무 현재의 이익만 좇지 않았으면 좋겠다. 손해 보는 것도 충분히 괜찮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