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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재영 Oct 27. 2019

첫사랑, 그녀

  자정을 넘긴 시각에 서울구치소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한 처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뒤로 가지런히 묶여 있고, 단정하게 제복을 입은 환한 얼굴은 멀리서도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992년 겨울, 서울 석계역 부근의 2층 커피숍이었다. 아는 고향 후배가 경주에서 올라온 그녀와 전주에서 올라온 내가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것이 안 돼 보였는지 친구처럼 지내라고 소개하여 준 것이 인연이 되어 몇 차례 만나서 데이트라는 것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아직 서울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고 그녀는 경기도 의왕시에 살고, 나는 서울 노원구에 살다 보니 만나러 가는 시간만도 2시간이 넘게 걸려 만남은 뜸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연락이 끊긴 지 1년이 되어갈 무렵 뜬금없이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심 보고도 싶고 궁금하기도 하던 차에 주저함이 없이 만나자고 하여 동대문구에 있는 족발 골목에서 다시 만나면서 인연의 끈을 이어져 가게 되었다. 후에 들은 말이지만 그녀가 나와 연락이 뜸해지고 나로부터 받았던 명함도 없앨 생각에 찢으려고 하는데 찢기지 않아서 책상 서랍에 던져두었는데,  한참이 지나 서랍을 보다가 명함을 발견하고 혹시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한 것이 다시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임용이 되고 첫 번째 발령이라고 선배님이 기념이라며 비닐로 코팅이 된 고급 명함을 만들어 주다 보니 쉽게 찢기지 않은 것이 연유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만나서인지 그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급속히 커져갔고, 매일매일 만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정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구치소에 근무하고 있어서 야간 근무를 하게 되면 연락도 할 수 없고 만날 수도 없게 되는데, 하루는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결국 사고를 치게 되었다. 자정이 되어 무조건 만나고 싶다는 마음에 택시를 타고 무작정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기사 아저씨는 한밤중에 구치소로 가자는 사연이 궁금했던지 나를 자꾸 힐끗힐끗 보더니 결국엔 못 참겠는지 단도직입으로 물어왔다. 대충 구치소를 찾아가는 이유를 알려드리자 그분은 젊으니까 좋다는 용기의 말씀을 해주시면서도 못 만날 가능성이 크다는 걱정도 잊지 않으셨다.


  구치소 정문 앞에 서니 사람 한 명 없이 주변은 고요하고 철문은 굳게 닫혀있어 어찌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에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시도는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문에 가서 쪽문에 달린 조그만 유리창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제복을 입은 직원이 유리창을 열고 누군데 밤중에 구치소에 와서 시끄럽게 하느냐고 하면서 왜 왔는지 경위를 물어봤다. 서울구치소에 근무하는 직원 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꼭 보고 싶어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서 정말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상황실에 한번 물어보겠다고 하였다. 한참이 지나서 그녀와 나는 서울구치소의 정문 앞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너무 감동스럽고 세상에 우리 둘만이 연애를 하는 것 같은 행복함이 가득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남들 못하는 연애나 하는 것처럼 요란을 피운다며 핀잔을 받을 꼴불견이었다는 생각에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민망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둑방 아래 벤치에 앉아 미리 가지고 간 캔 커피를 함께 마셨다. 의왕시만 하여도 외곽이라서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밝고 많았다. 보고 싶어 가는 길엔 만나서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얼굴을 보는 순간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고, 굳이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손을 잡고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당시 꽃다운 스물네 살의 나이에 임용이 되어 미혼 남자 직원들의 관심과 인기도 높아지고, 상사 분들의 소개팅도 받으며 주가가 막 올라가고 있었다고 한다. 한밤중의 방문객 사건이 생기면서 삽시간에 모든 직원들이 알게 되어 결혼할 사람이 있는 품절녀로 인식되면서 연애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할 때면 나만 연애를 많이 해본 것 같다며 아직도 못내 억울해하는 표정을 짓곤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서울구치소에서의 만남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서로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녀와 결혼을 하여 두 아이를 둔 가정을 이루며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최근 아내는 오랜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요즘에도 TV를 통해 서울구치소의 모습이 보이면 그때의 일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며 나만의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빠져 들곤 한다. 그럴 때면 아내의 손을 잡고 동네를 거닐며 서울구치소의 밤하늘을 그려 보곤 한다. 이젠 아내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나의 속내를 보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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