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째, 오늘은 짐을 최대한 줄이기로 했다. 아스토리아에서 속옷 세 벌, 양말 세족, 겉옷 두 벌, 바람막이 한 벌, 침낭, 안내서, 수저, 포크, 랜턴, 샌들, 약을 빼고 나머지 짐은 우체국 택배를 이용하여 산티아고로 보냈다. 조금 비웠음에도 날아갈 듯이 가벼워져 걷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러자 둘이 이야기하고 사진도 찍고 경치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며 다시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둘러보면서 다시 한번 이 길을 오게 된 이유를 새겨보았다. 시민들처럼 광장 파라솔 아래서 점심도 먹으며 잠시나마 순례자가 아닌 관광객의 모습이 되어보기도 했다.
잠시의 여유를 아쉬워하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산티아고로 향했다. 배낭 무게가 조금 가벼워져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걷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사설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슈퍼에서 과일과 라면을 구입하여 저녁 식사 준비를 해서 먹었다. 그곳에서 생장부터 혼자 여행 중이라는 어린 한국 여학생을 만났다. 이번 여행을 위해 빕스에서 1년간 일하면서 경비를 모으고 6개월 전에 저렴하게 항공권도 구입하여 자력으로 왔다고 했다. 그 학생에게 펼쳐질 미래의 삶이 궁금했다.
"인생은 선택과 결정의 과정인 것 같다. 매 순간 강요받은 선택과 결정을 하느냐,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과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 같다."
6일째, 오늘은 산을 두 개나 넘어야 해서 새벽 일찍 출발했다. 해 뜰 때까지 어두컴컴한 산속을 플래시에 의지하여 걸으며 짐승 소리에 가슴 졸이면서도, 촘촘히 박힌 아름다운 별과 멀리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힘든 줄 모르고 걸었다.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걷는다. 여행 자체가 걷는 것이지도 하지만, 오늘 하루 끝없는 길을 정말 많이 걷고 걸었다. 아내는 무릎에 무리가 와서 무척 고생하며 힘겹게 산을 넘었다.
계속 걸으면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이 여행을 위해 애써준 형제님, 곁에서 응원해 준 친구들에게 고맙다. 두 아들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된다. 그간 잘 자라줘서 고맙고, 그간 내가 아프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앞으로 정말 많이 사랑해 줘야겠다. 나중에 사랑을 더 주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도록 맘껏 사랑해야겠다.
저녁엔 여러 나라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 아내가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기쁨보다는 애잔한 마음이 앞섰다. 공부를 위해 홀로 멀리 떠나 있던 시간 동안의 고생과 노력이 느껴졌다. 식사 후에는 몇 일간의 경험을 토대로 무식하게 덤빈 계획을 수정하며 촘촘히 다시 세웠다. 사람은 경험하며 실수하며 배우는 것 같다.
"돈이 필요한 것도, 시간이 필요한 것도,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에 인색했을까?"
7일째, 오늘 하루도 무척 길었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걷고 또 걸었다. 도중에 폼 페르다에서 템플 기사단 성을 보았다.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책으로는 알 수 없는 값진 경험이 쌓여갔다. 아내는 이제 세계여행을 가도 되겠다고 농담 겸 자신감을 보였다. 유심도 사보고, 지도 보는 법도 배우고, 버스도 타고, 콜택시도 불러보았다. 많이 지치고 힘도 들지만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생활도 보고 배우고, 많은 한국인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것도 보면서 지금 나는 어떠한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 수없이 자신에게 되뇌어 본다.
오 세브레이로 산 정상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중에 감격스럽고 감사한 은혜를 많이 받았다. 얼마 전 힘든 일을 겪으면서 그동안 내가 업무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었다. 내 업무에 대한 정당성만을 주장하면서 상대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미사 중에 지나온 일들이 생각나면서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알게 모르게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의 기도를 올렸다. 주님 앞에 나의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물론 용서가 끝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라는 무거운 사명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간절히 찾고 싶었던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하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해 본다.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바로 행동으로 실천하며 경험하고 느껴라. 그래야 진짜 하는 것이다."
8일째, 전날 미사의 은총을 품고 새벽을 맞이했다. 오늘 일정은 다소 수월했다, 내리막에 날씨도 전형적인 가을 날씨이고, 경치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장관이어서 피곤할 새가 없었다. 다만 급경사가 있어서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여행 중 처음으로 아내와 말다툼을 했다. 이유는 너무 사소했다. 아내는 아침도 먹고 중간에 음료도 마셨으니 점심은 먹지 말고 가자는 것이고, 나는 식사가 중요하니 세끼를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단순해서 바로 해결은 되었지만, 몸도 피곤하고 힘들 텐데 비용까지 걱정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나의 무능함에 대한 자책이었던 것 같다.
모처럼 일정이 짧아서 숙소에 짐을 풀고 씻고 나니 세시가 안된 시간이었다. 여행 기간 중 가장 일찍 들어온 것 같다. 아내와 벤치에서 햇볕도 쐬고, 동네도 구경하고 다음 코스도 점검하고, 골목 카페에서 맥주도 한잔했다. 고됨 속에 이런 행복이 있어 다시 출발하곤 하였다.
숙소는 네 명이 한방에 배정되어 연세가 칠십 인 노부부와 함께 있게 되었다. 여행 중 가장 적은 인원이 한방을 쓴 곳이다. 많이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어 보였다. 도착해서 바로 휴식을 취하며 누워계셨다. 작년에 이은 두 번째 산티아고 여행이라고 한다. 과연 두 분은 왜 이곳을 두 번이나 찾은 것일까?
"가진 것이 없어도 자연이 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9일째, 사리아를 통과해서 한 구간을 더 가야 하는 다소 힘든 일정이다. 시작부터 내리막길이 많아 아내는 무척 힘들어하면서도 잘 견디며 최선을 다했다. 사리아에는 사람들도 많고, 그곳에서 숙박을 하는 여행객도 많아 보여서 조금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래도 예정대로 사리아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리아는 도시 자체가 산등성이에 형성되어 빠져나오는 길도 힘들고 어려웠다.
사리아를 지나 정부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입소하였는데, 매니저가 아내와 나를 서로 다른 침대의 위층으로 배정을 하였다. 우린 부부이고 침대들도 많이 비어있으니 한 침대의 위아래층을 달라고 하였으나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몇 차례 이야기를 해도 안된다고 하니 아내는 그냥 2층을 사용하자고 하였다. 방에 들어가 보니 자국민 부부에게는 침대 아래층으로만 각각 배정을 해 준 사실을 알게 되니 더욱 매니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아내는 많이 지쳐 있는 상태여서 2층 침대를 오르내리는 것이 무척 위험하였다. 막무가내인 매니저에게 언어 번역기를 동원하여 강하게 항의를 하였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래도 아내를 위해 포기할 수 없었다. 곁에 있던 자국민 부부가 난감했던지 중재를 하여 같은 침대는 아니어도 위아래층으로 침대 배정이 수정되었다.
여행하는 동안 모든 문제는 아내가 해결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걸 보며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이번 일로 조금이나마 가장의 체면이 섰던 사건이다. 자리 배정을 받고 산책을 하다가 홈메이드 식당을 보고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현지 가정에서 가정식 음식을 대하니 새로웠다. 식사 후엔 정원에 앉아서 지는 저녁노을을 보며 또 하루를 보낸다.
"사소하거나 수긍할 수 있는 경우에는 양보와 포기가 좋은 미덕이 될 수 있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