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재영 Apr 17. 2021

삼식이


은퇴 후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남편을 가리키는 신조어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집에 있으면서 밥을 먹는데 왜 이런 비꼬는 표현이 만들어졌을까? 평소 남편이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며 불평불만이 많던 아내가 정작 남편이 집에 있기 시작하니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보고 싶던 남편이 집에 같이 있어주면 좋지 않을까? 딱히 갈 곳도 없는 남편이 집에 좀 있겠다는데 왜 싫어하는 걸까? 해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받기만 했다. 아내가 챙겨주는 밥상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반복적이며 습관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여겨 왔다. 가끔 시간 여유가 있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식사를 대신 준비해 준 적이 있긴 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지 하기 싫어도 의무이기에 한 적은 없었다. 반찬 걱정을 하는 아내의 넋두리를 들으면서도 그냥 있는 대로 챙겨주면 될 것을 왜 그리 걱정을 할까 생각하며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찬 타박을 하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어주는데 복에 겨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 집 남자 세 명은 아내가 챙겨주는 밥상을 받으며 살아왔다. 


평소 받기만 하는 나도 요리를 하는 경우가 몇 번 있다. 캠핑을 가면 식사 준비는 나의 담당이다. 장을 볼 때부터 여행 중 끼니를 계산해서 재료를 미리 준비한다. 아침은 전날 음주에 대비해서 콩나물국으로 준비하고, 점심은 우리나라 대표 요리인 라면이다. 저녁이 조금 복잡한데 캠핑의 꽃인 바비큐 파티를 위해 삼겹살과 소시지를 준비하고 찌개거리로 꽁치 통조림을 준비한다. 처음 캠핑을 갔을 때 직접 끓여 준 꽁치 통조림 김치찌개가 아내나 아이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후로는 매번 빠지지 않는 메뉴가 되었다. 요리도 쉽고 실패 확률도 거의 없어서 지금까지도 나의 주 요리로 애용하고 있다. 


아내의 생일날에도 요리를 한다. 지금까지 아내의 생일 밥상만큼은 직접 준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아내가 자신의 생일상을 직접 준비하는 일만큼은 없도록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특별히 미역국은 정성을 다해 맛있게 준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역은 미리 씻어 불리고 소고기는 투플러스 한우로 구입하여 불에 한번 볶아서 국을 끓인다. 매년 끓이다 보니 솜씨도 늘어서 미역국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괜찮은 요리로 자리 잡았다. 가끔 기분이 내키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장을 봐서 음식을 준비하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제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람은 매일 세끼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준비하지 않으면 끼니를 굶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밥을 먹는다는 게 일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간도 많이 투자해야 하고 힘든 노동이라는 사실도 배우게 되었다. 퇴근을 하면 밥솥에 밥이 있는지 확인하고 뭘 먹을지 생각해야 한다. 유튜브를 보고 한 가지 요리를 하는 데도 한 시간 가까이 든다. 가까스로 반찬을 준비해서 혼밥을 하고 설거지까지 하면 1차가 끝난 것이다. 다음은 바로 아침 준비를 해야 한다. 아침 식사에 국이 있어야 하는 습관 때문에 매번 무슨 국을 끓여야 할 지도 큰 고민거리이다. 점심은 회사에서 해결한다 해도 매일 아침과 저녁을 준비하고 주말에는 세끼를 모두 준비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두 번은 마트로 장을 보러 가야 한다. 어떤 때는 일상이 먹는 것에 모두 메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내는 1주나 2주 정도에 한 번씩 제주에 온다. 남편이 굶지 않고 잘 먹고 사는지 살펴보러 오는 것 같기도 하다. 30년 노하우의 베테랑 아내는 주방과 냉장고를 쑥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뭘 해 먹고 지냈는지, 굶지는 않고 잘 먹고 있는지 대충 아는 듯했다. 처음에는 잔소리가 많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잔소리보다는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려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요즘엔 요리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칭찬 세례를 쏟아붓고 있다. 장을 보러 가서도 직접 구매하지 않고 식재료를 고르는 법을 세세히 가르쳐주고, 나로 하여금 직접 구매하게 한다. 양념도 기본적인 것 외에 여러 가지 맛을 낼 수 있는 다양한 양념과 재료를 구해서 사용법을 가르쳐 준다. 요리를 할 때에도 내가 대충 하는 듯하면 재료 별로 요리하는 법을 세세히 알려준다. 주방의 용품이나 식기, 양념, 식재료들이 본가의 주방이나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제주에서도 대가족을 모시고 잔치를 치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쯤 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내가 진정 나의 식사를 걱정해서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나를 주부로 양성하기 위해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아내는 나의 퇴직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퇴직 후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종종 하다 보니 행여 세끼를 모두 집에서 먹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일찍 명퇴를 하여 제2의 직업을 준비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떨어져 지내는 김에 역할을 바꾸기 위한 사전 준비를 계획하고 있는 것 같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 수고해 준 아내를 위해 본격적인 주부 훈련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알량한 생각에 주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생활한 지 8개월이 넘다 보니 주부까지는 아니어도 주부 흉내는 내는 것 같다. 좀 더 배워 살림 잘하는 주부가 될 것인지, 이쯤 해서 독신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만 배우고 말 것인지 고민 중이다. 다행인 것은 퇴직 후에 집돌이로 살아도 삼식이가 되거나 끼니를 거르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주가 준 선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올레 길 위에 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