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제주에 온 후 신혼의 단 꿈을 꾸고 있었다. 30년 만에 둘 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아내와 올레 길도 걷고 곳곳의 맛집도 다니고 이색적인 카페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지냈다. 아이들에 치여 정신없이 생활하던 아내도 제주에서의 생활이 너무 좋다고 하였다. 나도 주중에는 회사에 다니며 자유인으로 호젓한 생활을 즐기다가, 주말에는 아내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최상의 주말부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꿈같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만 너무 재밌게 지내는 거 아냐 하는 불안함이 들기 시작했다. 달콤한 시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저 여기 제주공항인데요, 좀 데리러 와 주실래요?” 막 퇴근을 하려는 데 전화가 왔다. 둘째 아이였다. 제주에 놀러 왔나 보다 생각하며 공항에 갔다. 가방은 메고 한 손엔 가방을 들고 한 손엔 캐리어를 잡고 있는 둘째를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니, 무슨 짐이 이렇게 많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코로나로 학교가 폐쇄되고 비대면 수업이 길어지면서 너무 답답하여 당분간 제주에 머무르려고 왔다는 것이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그럼 나는?’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주에 온 둘째는 화상으로 수업을 받고 과제도 하면서 나름 바쁜 생활을 하며 지냈다. 적적하던 집에 온기도 느껴지고 말동무도 되어주어 덜 외롭기도 하였다. 물론 대충 먹던 식사를 제대로 준비해야 하고, 일거리가 많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불편함보다는 좋은 점이 많아서 괜찮았다. 서로의 생활은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각자 자신의 일정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째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고, 나에게 뭔가 숨기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집에 와 보니 시커먼 곰 한 마리가 더 와 있었다. 첫째가 온 것이다.
둘째가 첫째를 꼬드긴 것이다. 아빠는 직장생활에 메여 바쁘기도 하고 아빠와 같이 지내는 게 무료하고 심심하다 보니 형을 불러들였다. 제주에 오니 엄마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구경할 것도 먹을 것도 많고, 날씨도 따뜻해서 생활하기 좋다는 온갖 좋은 말로 설득을 한 것이다. 한 명과 두 명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시커먼 곰 두 마리가 있다 보니 집은 비좁아지고, 한 끼 한 끼 먹는 양도 엄청나고, 빨래와 청소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취미생활도 힘들어지고 자유를 만끽하던 주중도 가사에 반납을 해야 한다. 완전한 주부가 되었다.
육지에서 전화가 왔다. 두 아들을 데리고 있느라 고생이겠다는 걱정 어린 아내의 목소리가 밝고 경쾌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이 없으니 허전하고 적적하다는 말도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친구도 만나고 취미생활도 하며 전보다 더 바쁘고 재밌게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들린다. 제주에 오는 간격도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의기소침하던 둘째도 형이 오니 얼굴이 밝아졌다. 원래 의기투합이 잘되는 형제라 같이 공부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가끔 외식도 하면서 하루하루 재밌고 즐겁게 지낸다. 첫째도 처음에는 답답해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오랜만에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생각할 시간도 많고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문제는 나에게 있나 보다. 모두 다 즐겁고 행복해하는데 나만 힘들고 답답하고 즐겁지가 않다. 아내가 오면 구석구석 집안 청소도 하고, 밀린 빨래도 하고, 이곳저곳 장을 봐서 반찬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어졌다. 틈틈이 나의 기분을 맞추어 주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전처럼 즐겁지가 않다. 아내는 곰 세 마리가 지낼 살림 보충을 어느 정도 마치면 무척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제주를 떠난다. 제주 살림은 온전히 나의 몫으로 남는다.
고된 살림살이가 한계치에 다다를 무렵, 이를 해결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발표했다. 아침 식사는 같이 해야 하고, 자신의 옷이며 물건들은 항상 정 위치에 두어야 하고, 빨래와 설거지도 순번을 정해 같이 하기로 하였다. 이 정도면 본가에서 생활하는 거나 별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아이들도 조금씩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제주에서의 생활을 힘들어하였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 기대하며 조금의 실수에도 엄마를 능가할 잔소리를 하였다. 기대와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역효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일찍 일어나서 정리정돈도 잘하고 집안 일도 분담해서 열심히 하였다. 제주에 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하루는 아이들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전주에서 할 일이 많지 않냐? 학교도 다녀야 하고 친구들도 보고 싶을 텐데” 첫째가 의도를 눈치챘는지 “저희들이 와서 힘드시죠?”라고 한다. 내 생각을 알아챈 것 같아 내심 안도하며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대하였다. “친구도 만나고 싶고 집에 가면 편하긴 한데 여기서 지내면서 취업 준비를 하려고요.” 둘째도 한마디 거든다. “올해도 저희 학교가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해서 딱히 학교에 갈 일이 없어요. 저도 여기에 있으면서 수업도 받고 공부도 좀 하려고요.” 둘이 입이라도 맞춘 듯 마지막 말이 걸작이다. “아버지에게 불청객은 안되게 잘할게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표정관리가 어렵다. 곁에 있던 아내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