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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재영 Jan 22. 2023

도로 위의 사람들

퇴직을 하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남들 모두 출근한 오전에 아무 방해 없이 홀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내가 다녔던 직장은 9시에 출근을 하면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퇴근하는 6시까지 사무실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31년 동안 실내에 갇혀 꼼짝하지 못하고 생활하였다. 다른 직장인들을 보면 출장도 많고 밖에 다니면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고, 실내에서 일을 하는 보직이더라도 우리처럼 평생을 사무실에서만 일을 하는 직장은 거의 없으므로 나의 직장생활에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었다. 연가라도 내서 하루 정도 쉬면서 시내를 돌아다니면 왜 그리 대낮에 노는(?) 사람들이 많은 지 부럽기도 하고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저 많은 사람들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일을 해야 하는 낮 시간에 일을 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 눈에는 사무실에서 있는 것만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낮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놀러 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퇴직을 하면 벌건 대낮에 할 일 없이 여기저기 쏘다녀보고 싶다는 마음을 다지곤 했다. 


퇴직을 하자 이제야 해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날아갈 듯 기뻤다.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다. 이전에 하던 일은 온종일 실내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조사하는 일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맡은 업무는 완전 다른 일이었다. 실내에서 하는 일은 전체 업무의 10분의 1 정도이고 그 외 시간은 밖에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다. 앗싸! 하는 마음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체 철부지 중년의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한 보따리 일거리를 가지고 나와 시내를 방황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문서를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게 나의 업무이다. 하루 이틀은 할 만했다. 조금 힘은 들어도 시간을 내서 운동도 한다는데 일도 하면서 운동도 하니 일석이조 아니냐고 위안을 삼으며 일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평생 실내에서만 일하다가 하루 몇 시간을 밖에서 일을 하다 보니 너무 힘들었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심신이 지쳐 갈 무렵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내 주위에서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일거리를 가지고 시내에 나서면 여기저기 거리를 누비는 택배원과 우편집배원들을 만나게 된다. 차량과 오토바이를 타고 복잡한 거리를 요리 저리 빠져나가는 모습이 신기롭고 놀라웠다. 요즘이야 주소 정비가 잘 되어 번지를 찾는 게 쉬운 편이지만 그래도 꾸불꾸불 골목길에서 번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때 택배원과 집배원 친구들을 만나면 문제가 금방 해결된다. 더욱 난감한 것은 다가구 주택의 경우 비번을 모르면 안으로 진입이 어렵다. 한참을 서성이며 난감해하고 있으면 구세주가 나타난다. 배달원끼리 암호처럼 비밀번호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적여 둔다는 노하우도 그 친구들로부터 배운 귀한 지식이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거리의 사람들이 배달 라이더로 바뀐다. 배달 라이더는 집을 찾아다니며 배달을 하는 분야에선 최고의 고수이다. 어떤 아파트는 1층 현관에서 호출이 안되니 직접 올라가 봐야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느니, 아파트마다 현관으로 쉽게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 지상으로 가는 게 나은지, 지하 주차장층을 이용하는 게 나은지 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고수는 한눈에 모든 걸 알아본다고 그 친구들도 나를 보면 배달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초보라는 걸 금방 알아보고 눈인사도 나눠주고 물어보는 것에 대해 친절하고 자세하게 가르쳐 준다. 그 친구들 덕분에 업무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라져서 이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사회에 나오면서 자신이 있었다. 30년이 넘는 동안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어느 정도 성공도 하였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므로 퇴직을 하여도 그동안 배운 노하우로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며 잘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최고라는 자신감도 한몫해서 나 혼자 어떤 일이든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강했다. 이러한 자만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회생활은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적응도 못하고 그 정도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할 무렵 그 친구들이 내밀어 준 손길은 나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힘과 응원이 되어 주었다. 그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포기까지는 아니어도 적응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세상에 나 혼자만 이런 힘든 일을 한다는 생각에 불만과 불평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들은 자신의 일에 전문가로서 자긍심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해 준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있음에도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며 좋은 인식을 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일을 해보지 않았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멋진 친구들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처럼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으면 살아갈 것이다. 태어나서는 부모님의 도움을,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도움을,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생활하여 온 것이다. 


지금도 아내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 아내가 없었으면 이 일을 중도에 포기하거나 아직도 힘에 겨워 하루하루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자 아내는 먼저 소형 SUV 차량의 바퀴를 교체하고 내비게이션도 최신으로 업그레이드하여 만반의 준비를 했다. 문서를 들고 일을 나서면 아내는 운전대를 잡고 함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하루 수십 곳의 집을 방문해야 하므로 차량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주차는 정말 힘든 일이다. 아파트는 용이할 거라 생각하였는데 큰 오산이다. 최근에 입주한 몇몇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주차 여건이 정말 심각하다. 승용차가 지나가기에 종잇장 한 장 정도의 여유만 있는 좁은 골목은 왜 그렇게 많은 지 놀라울 정도였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나를 내려주고 안전한 곳에 주차를 하고 다음 장소를 입력하고 나를 기다려준다. 운전 걱정이나 주차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나의 일에만 전념하면 된다. 시간도 단축되고 스트레스도 덜 받게 되어 능률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 둘이 호흡을 맞춘 지도 몇 달이 되어 간다. 이제는 서로의 눈만 보아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정도이다. 


하루가 밝았다. 아내가 자동차 열쇠를 들고 대문을 나서면서 한마디 한다.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벌건 대낮에 맘껏 돌아다니게 되어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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