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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해 Apr 24. 2020

DAY+2 / NO PLAN

 분명 눈이 감기고 노곤해서 누웠는데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잠들어 보려고 했는데, 한 시간 정도 뒤척이다가 포기하고 오디오 클립을 켜고 공유의 배드-타임 스토리를 틀었다. 30분쯤 반수면상태로 듣다가 잠이 든 것 같다. 잠결에 밝아진 창문과 호스트인 리아와 잭의 말소리, 샤워소리를 들었다. 계획했던 대로 알람 없이 일어나고 싶은 때에 일어났다. 9시 30분. 아직 피곤함이 남아있는데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아직 몸에 긴장이 덜 풀어진 것 같다.

 방 밖에 나와보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을 한 잔 마시니 위가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서둘러 준비한 뒤에 잔뜩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집을 나섰다. 어제 공항에서 마신 플랫화이트가 마지막 섭취물이었다. 어제 자고 일어난 늦은 밤에 뭐라도 사다 먹을까 고민했지만, 초면인 도시에서 너무 늦은 시간에 나가는 게 불편하기도 하고 최근 3-4개월 동안 먹어댄 걸 생각하면 하루 정도는 좀 비울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서 참았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공복감이었다. 자기 전에 구글맵으로 봐 두었던 식당이 많던 해변가 번화가로 서둘러 발을 옮겼다.


너무 짜

 지나던 길에 있는 샐러드 볼이 그려진 입간판에 시선을 뺏겼다가, 더 바다 가까이에 앉고 싶은 마음에 해변에 바로 앞에 있는 가게에 들어갔다. 어느 가게를 가든 가게의 이름을 건 메뉴가 있으면 그 시그니처를 먹는 편이라 ‘LUSH BREAKFAST’와 ‘LONG-BLACK COFFEE OVER ICE’를 주문했다. 달걀이 두 개에 빵도 네 조각이나 나오는 엄청난 양의 메뉴였다. 잘 구운 빵에 버터를 발라 베어 물었다. 바사삭, 하는 소리에 갑자기 흥이 났다. 밤새 억누른 허기가 몰려와 빵 한쪽을 단숨에 해치웠다. 플레이트에는 베이컨과 초리조 소시지도 있었는데, 너무 짜서 얼마 못 먹었다. 서른 해 넘게 먹어온 익숙한 소시지와 사뭇 달랐다. 이러니까 소시지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거겠지? 정말. 끓는 물에 두 번 정도 담갔다가 굽고 싶은 욕망이 모락모락. 다신 못 먹을 것 같아.

 롱-블랙은 말 그대로 에스프레소를 길게 뽑은 다음, 얼음에 부어 차갑게 만든 에스프레소 음료였다. 긴 추출의 맛이 느껴지는 그런 블랙커피였다. 그렇지만 3일 만에 만난 차가운 카페인은 감겨있던 정신을 바짝 들게 했다. 역시 카페인은 아이스로 들이켜야 제 맛. (근데 역시 그냥 아아 마시고 싶다.)


BONDI BEACH

 오늘은 구름이 많아 날이 흐리고, 소나기가 내릴 확률이 20% 임에도 불구.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안 낄 수가 없었다. 차양 없는 곳에 앉아있으니 곧바로 정수리가 익어가는 느낌이 들어 서둘러 모자를 꺼내 썼다. 벤치에 앉아 바다를 쳐다봤다. 그레이와 블루 사이의 다양한 색으로 물든 흐린 하늘과 바다에서 사람들이 작게 계속 움직였다. 모래 위에는 자유로운 복장의 사람들이 앉거나 누워서 드러나지 않는 해를 양껏 즐기고 있었다. 사이사이 이어폰을 끼고 달리는 사람들과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이 스쳐갔다. 벤치 뒤로 펼쳐진 완만한 경사의 잔디에서도 각자의 모양대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신기하게도 휴대폰을 만지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의외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치 타월 한 장을 깔고 누워 선글라스를 끼고 책을 읽는 남자가 제일 좋아 보였다. 나도 저거 해야지!


 짠 음식을 먹은 탓인지 계속, 물과 과일이 생각났지만 첫 본다이 비치의 풍경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곳 풍경에 낯선 건 나뿐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과 하늘을 잔뜩 메운 구름, 금빛 모래를 즐기는 사람들이 커다란 그림처럼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낯선 곳에서 잠겨있던 마음의 빗장이 느슨해지는 걸 느끼며 보이지 않는 해 아래의 시간을 만끽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나고, 더 이상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 과일가게를 검색해서 씩씩하게 걸어갔다.


과일 물가

 룰루. 나는야, 과일을 먹을 테다! 부자처럼 먹을 테다! 구글맵으로 검색해 본 과일 가게는 멀지 않았지만 언덕길이라 조금 힘들었다. 많이 먹으려던 마음은 과일의 무게에 대한 부담으로 미루어 두고, 수박 1/4조각과 망고 하나, 그린 스미스 사과 한 알을 사고 $11.30을 냈다. 대충 9천 원. 한국이랑 비슷한 가격으로 느껴졌다. 최저임금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과일 물가가 낮긴 하다. 오늘 날짜 신문을 하나 구입해서 신나게 집으로 돌아왔다. 와인도 한 병 살까 하다 관뒀다. 요즘 잠도 통 못 잔 데다 피로 해소가 안돼 눈에 노란빛이 보인다. 가실 때까진 조금이라도 술을 자제해야 될 것 같아서 참았다. ‘만성피로와 피로 누적입니다. 간이 안 좋아요. 관리해야죠.’ 안과에 가봐야 의사가 할 말은 정해져 있으니 과일로 당과 비타민을 섭취하고, 쉬어야지. /21FEB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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