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로맨스는 어딘가 잘못되었다 Part 1
비포 선라이즈.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남녀가 하루 동안 함께 보내는 시간을 그린 영화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남녀의 이야기는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상영 시간 내내 끊임없이 이어진다.
수년 전에 보았던 이 영화를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햇수로만 27년이 지난 영화지만 지금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로망은 현재 진행형이다. 바로 여행지에서 이루어지는 뜻밖의 로맨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가슴 떨릴 그 순간을 기대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것이 한 여름밤의 꿈으로 끝날지 아니면 일생의 사랑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여행을 떠나본 이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리라.
나 역시도 그랬다. 생애 첫 해외여행. 그로부터 이어질 오랜 체류 기간 동안 나에게도 로맨스가 찾아오지 않을까. 오겠지? 라며 김칫국을 한 사발 드링킹 했더랬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찾아오긴 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그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의 로맨스는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렇다. 이 이야기는 내 마음을 아니 동공을 크게 흔들어 놓았던 이야기들이다.
대학교의 방학은 꽤 긴 편이다. 거의 두 달 정도나 되니 그 기간 동안 대학생들은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데, 그중에 하나가 어학연수다. 짧은 시간 안에 영어 실력을 올리려면 방학을 이용하여 어학연수라도 다녀오는 것이 꽤 도움이 되니까. 이왕 영어를 배우러 가는 거 미국이나 영국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냐만 두 달간 사용할 체류비를 계산해보면 짧은 기간에 비해 꽤나 큰돈이 빠져나간다. 그래서 보통 선택하는 나라가 그나마 가까운 필리핀인데 나 역시 여러모로 계산을 해보다가 필리핀으로 가닥을 잡았다.
해외를 다녀본 경험이 없다 보니 준비라고는 뭐 철저하게 한 게 없었다. 나름대로야 이것저것 준비한다고는 했지만 대부분 어떻게 공부할지에 대한 것 정도였다. 지금에 와 생각하면 방문할 나라의 문화라거나 사람들의 성향이라거나 정말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이 출발했다. 알았다면 정신적 충격이 덜 했을까…?
필리핀 세부에 있는 기숙사형 학원은 평일 외출이나 외박이 금지되어 있다. 학원 내에 주전부리를 살만한 매점은 있으나 생필품 등은 외부에서 사 와야 한다.
기숙사에 도착한 다음 날, 근처의 쇼핑몰에서 생필품 등을 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가장 먼저 휴대폰 가게로 가서 선불 유심을 샀다. 같이 공부할 친구들끼리 연락할 때도 필요하고 주말에 외출을 하게 되면 안전을 위해서라도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은 필요하니까.
매장의 직원들은 마치 10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만난 듯 유난을 떨며 나를 맞아줬다. 필리핀 사람들은 친화력이 어마어마하구나 생각하며 유심에 대한 설명을 듣는데 설명해주는 남자 직원의 얼굴이 유난히 가까웠다. 과하다 싶을 만큼 열정적으로 바라봐주는 눈빛이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외국 사람들은 눈을 보며 말하는 게 예의라더라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어서 가능한 눈을 맞추며 설명을 들었다.
유심을 구매하고 나오던 나에게 아쉬운 듯 바이 바이라고 하던 직원을 뒤로하며 참 친절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마트 등에 들러 슬리퍼와 부족한 생필품을 사고 남는 시간에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 층을 더 올라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는데, 위층에서 두 명의 여자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게 아닌가. 한눈에 시선을 끄는 화려한 복장에 누가 봐도 미인인 여성들인지라 나도 모르게 눈을 빼앗겼다. 나는 올라가고 그녀들은 내려가는 길이니 자연스레 시선이 교차하며 지나가는데, 거의 다 올라가 아래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니 그때까지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일에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돌아가야 할 시간까지 여유가 많지는 않으니 짐짓 모른 체하며 내 갈 길을 갔다.
화장품 가게에 들러 로션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친다.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까 그 여인들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순간 별에 별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에게도 봄이 오나 였다.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하다더니 내가 필리핀에서는 좀 괜찮은 타입인 건가 라는 행복 회로를 돌리다가 순간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이거 인신매매인가? 아니 장기 매매인가? 따라가면 지갑 뺏기는 건 아니겠지?
빨간 옷을 입은 한 명은 바로 내 앞에 서 있고 파란 옷을 입은 다른 한 명은 그녀 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서 있었다.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빨간 옷의 여인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네들끼리 들리지도 않게 속닥속닥하고는 나에게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 쏟아지는 질문에 영어로 듣고 답하는 것만도 버거워서 처음의 혼란스러움을 잊고 대화를 이어가는데, 5분이 지나도록 뒤에 서 있는 파란 옷의 여인은 입을 열 기미가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있다 보니 적당히 대화를 하고 가려는데, 전화번호를 교환하잔다. 전화번호쯤이야 하고 서로의 번호를 찍어주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데, 불쑥 파란 옷의 여인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오빠라는 말로 입을 연 그 순간. 어떻게 오빠라는 말을 알까 같은 근본적인 질문보다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딱 하나 ‘형 목소리가 왜 거기서 나와…? 하동균인가? 그 형 노래 잘 부르겠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도 잠시. 가녀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허스키한 동굴 목소리에 세상이 멈춘 듯했다.
사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킨다고 더듬거리는 말로 어설프게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짐했다. 여행지에서의 인연은 개뿔... 공부나 하자고.
다음날 수업을 맡은 선생님과 전날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선생님은 깔깔대며 의외로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게 아닌가.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보니 친절하게 대해주는 경우도 많고, 필리핀에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의 비율도 꽤 높은 편이라는 거다.
본인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소위 썰을 풀자면 식민 지배의 역사가 길게 이어졌다 보니 남자들이 전쟁에 동원되는 경우도 많고 그게 아니더라도 반란 등의 위험이 있으니 사전에 싹을 자르기 위해 남자아이들을 학살하는 일도 빈번히 있었단다. 자식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여장시키거나 여성처럼 행동하게 만들다 보니 여성적인 남자들에 대한 편견 같은 게 사라지고 그것이 지금처럼 동성애 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로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직접 본 게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휴대폰 매장의 그 직원도 분명 게이일 거라며 애정 표현도 받고 헌팅도 당하고 어제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번이나 그런 일이 생겼다니 인기가 많아 좋겠다고 놀려댔다.
호의는 고맙게 받겠습니다만 그 이상은 제가 감당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원 내의 선생님들 중에서도 게이인 분들이 꽤 많았다. 딱 봐도 게이인 선생님도 있었고,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도 게이인 선생님도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까지는 실제로 마주친 적도 없던 만화나 드라마 등에서만 보아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찌 보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마 사람들이 좋아서이지 않았을까? 언제나 밝게 웃고 즐겁게 떠들고 또 세심하게 챙겨줄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이 꽤나 인상 깊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붙어서 일대일로 수업을 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세부를 떠날 때까지 두 달 가까이를 그렇게 지내다 보니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서 결국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달까.
덕분에 영어 실력도 어지간히 늘었고 예상치 못한 특수 스킬도 새로 얻어서 호주로 갔다. 바로 게이다(Gaydar)(게이(gay)와 레이다(radar)의 합성어로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를 판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물론 판독률이 0%에 수렴할 정도로 형편없는 능력이었지만 나름 재미있는 촉이랄까.
이 특수한 기술은 호주에서도 어김없이 형편없는 판독률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건 다음 편에서 이야기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