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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Oct 01. 2022

캡틴큐와 와인의 상관관계

하핫 개판이네?

그대는 아는가 다음날 숙취가 없다는 전설의 술 캡틴큐를. 정말 숙취가 없는 건 아니고 다음 날이 삭제되어서 ‘다음날 숙취’가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실은 다음날을 삭제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은 단종되어 더 이상 맛보고 싶어도 맛볼 수 없는 진정 전설의 술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정정을 하나 하자면 알아보기 쉽게 ‘캡틴큐’라고 적었지만 정식 상표명은 ‘캪틴큐’다. 캡이 아니라 캪이다.

하기사 한 병을 다 비우고 나면 캡이 됐든 캪이 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텐데.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될 캪틴큐 이야기를 꺼낸 건 불현듯 스쳐 지나간 숙취의 향기 때문이다. 고급스럽게 홍차에 마들렌도 아니고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숙취와 토악질의 기억이라니.


소주, 맥주, 위스키, 사케 등등 여러 가지 술을 마셔보고 취해보고 숙취도 겪어봤지만 캪틴큐와 가장 유사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주종이 바로 와인이다.  정확히 하자면 멜버른 숙소에서 마셨던 단 하루, 그날의 와인.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와인을 먹고 그렇게나 취한 적은 없다. 호주에 있는 동안에야 고통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였고 한국에서는 와인이 비싸기도 해서 취할 만큼 마실 이유가 없었다.


멜버른에 도착해 기숙사라고 하기도 뭐하고 숙소라고 하기도 뭐한 애매한 곳에서 1달여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호텔에서 운영하는 숙박 시설이었고 수영장에 편의 시설도 있어서 언뜻 보기에는 나름 럭셔리해 보이기도 했다.


실상은 싱글 베드 3개도 채 못 들어갈 정도로 작은 방에 한 층에 공동 주방 하나만 있는 구조라 호스텔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만 지내다 방을 빼줘야 할 판이니 머무는 동안 정을 붙일 만한 여유는 없었다고 해야겠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니 지내다 보면 오다가다 익숙한 얼굴이 생기기 마련이다. 짐을 푼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어느 날, 저녁을 만들기 위해 주방을 사용하다가 말을 튼 친구들이 생겼는데 이 친구들이 내 방 바로 옆과 앞 방에 머물고 있었다. 하필 말을 튼 상대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도 신기했고 스스럼없이 시원시원한 성격도 마음에 들어서 한 순간에 의기투합했다.


이렇게 얼굴을 트고 나면 다음 단계는 자연스레 정해져 있다. 자취방이나 다름없는 기숙사에 옹기종기 모여있으면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쓸데없는 농지거리로 열을 올리다가 술이 좀 오른다 싶으면 살아온 이야기를 섞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루 이틀 술 한 잔 하며 친해지다 보니 함께 술을 사러 간 것도 여러 번이다. 처음에는 맥주, 다음에는 와인, 그다음에는 맥주에 와인 그러다 비루한 학생 신분에 병 와인은 사치라며 4리터 박스 와인으로 배를 채우는… 아니 술을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의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저녁 식사 준비를 맡겨놓고 친구와 둘이 마트로 나섰다.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대형마트인 울월스(Woolworth)가 있는데 그 건물에 주류를 판매하는 가게가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매번 양손 가득 술을 사 왔다.

귀여운 대문과 잘 가꿔진 정원을 가진 집이 많다.

마트를 갈 때마다 1분이라도 단축하기 위해 동네 사이로 이어진 작은 길을 통해 갔다. 가는 길에는 꽤나 큰 공원이 있는데 낮에 보면 아이들이 뛰어노는 평화로운 공원으로 보이지만 저녁이 되면 그렇게 스산할 수가 없다.

하필 멜버른을 가기 전에 풍문으로 안 좋은 말을 들었다. 해외에서는 저녁 어두울 때 공원에 가는 게 아니라며 동네 갱처럼 위험한 애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디는 마약하는 애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근처도 가지 말라는 것이다. 눈으로 보지 않은 걸 다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내용들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큰길을 따라 돌아가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6시가 넘으면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닫아서 어두운 건 매한가지였고 무엇보다 괜히 돌아가면서 시간을 더 쓰고 싶지는 않았다.


팩 와인에 절여지던 나날이 지겨워져서였을까. 그날따라  술 가게를 꼼꼼히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보다 보니 신기한 술이 많았다. 와인이야 종류가 워낙에 많으니 봐도 봐도 새로울 따름이었지만.

그러다 한 친구가 이것 좀 보라며 큼직한 병을 머리 위로 들고 흔들어댔다. 2리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뚱뚱하고 거대한 유리병이었는데, 화이트 와인이 들어 있는지 살짝 노르스름한 빛깔이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 대단한 발견인가 싶어 갔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 정도 양이면 20 - 30달러는 훌쩍 넘기는 게 기본인데 15달러 수준의 말도 안 되는 싼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매번 박스 와인만 먹던 것도 지쳐가던 차에 오늘은 너로 정했다 싶어서  두 번 고민 안 하고 결정했다.

어차피 먹다 남은 박스 와인도 있겠다. 오늘은 술 파티다 싶어서(사실은 그 며칠간 거의 매일 술 파티이긴 했다) 맥주를 포함해 다른 술도 넉넉히 샀다.

평화로운 공원의 낮

숙소로 돌아올 때도 역시 공원 옆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사람 소리인지 동물 소리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에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밤에 지나갈 때면 시선도 안 주고 가던 공원인데 이상한 소리에 발이 잡혀서 슬쩍 고개를 돌려 어두운 공원을 훔쳐봤다. 그 어둠 속에 뭐가 보이겠냐마는…

잠시 미쳤는지 좀 가까이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차에 다시 한번 그 이상한 소리가 귓가를 스치자마자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술병이 부딪히는 소리도 개의치 않고 부리나케 도망갔다.


진땀 반, 식은땀 반을 흘리며 숙소 정문에 도착하고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한동안 저 길로는 못 다니겠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숙소로 들어섰다.


파스타와 소시지 등 저녁 겸 안주가 뜨뜻하게 완성되어 있어서 바로 술을 깠다. 시작이야 만국 공통 맥주지. 목구멍에 시원하게 터널 공사를 해주고 나면 다른 술도 매끈해진 도로 위로 쌩쌩 달려 들어온다.

맥주가 끝나자마자 바로 새로 사 온 와인을 열었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병 와인인가 싶어서 잔에 따르는 족족 소주 마시듯 원샷을 때려 넣었다. 이게 또 맛이 은근히 달달해서 술을 마시는지 음료수를 마시는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뚱뚱한 병을 가득 채웠던 액체가 바닥을 드러내는 데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오늘따라 술도 잘 받는다 싶어서 남아있던 박스 와인이고 뭐고 줄줄이 까다가 눈을 떴다. 해가 중천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1초 전까지 술을 까고 있었는데 갑자기 침대에 뻗은 채 눈알만 떼굴떼굴 굴리고 있었다. 한두 바퀴 굴렸을까.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솟아나서 침대 시트가 다 젖기 시작했다. 바늘 수천 개가 온몸을 찌르는 듯 아팠다.

삼장법사의 주문을 들을 때마다 긴고아가 머리를 옥죄어 오던 손오공의 기분이 이랬을까. 머리가 옥죄이다 못해 호리병처럼 정수리가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배 속은 마이크 타이슨이 핵펀치를 한 대 박아 넣은 것처럼 내장이 뒤틀렸다. 배 속에서 쿠르릉 쾅쾅 소리가 터지고 곧이어 신호가 왔다. 화장실을 갔는데… 이건 비위상 안 좋으니 그냥 위아래로 다 힘들었다 정도로 정리하련다.


몇 번인가 사선을 오가고 배 속이 조금 정리될 즈음. 언젠가 보았던 광고의 카피가 생각났다.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던가…

하… 정말이다. 어떻게든 똑바로 앉아보려 노력해도 시루떡을 세워놓으면 꺾이며 앞뒤로 고꾸라지듯, 허리가 꺾이며 머리가 발바닥으로 달라붙었다.

허리 유연성을 시험하며 머리가 발바닥에 몇 번이고 붙다 보니 이런 적이 있었다. 그래… 캪틴큐… 그 진한 향기를 호주까지 와서 느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 객기로 한 번 먹어본 후 다시는 입에도 대고 싶지 않았는데 그 숙취를 이역만리 호주에서 느낄 줄이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까지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시진 않았다는 게 의아했다. 널브러진 술병들을 보다 보니 어제 사온 새로운 병와인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싶어 병 뒤쪽을 훑어보았다. 왜 와인 도수가 20도가 넘지…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와인이라고 다 12도 수준의 도수를 유지하는 게 아니었다. 브랜디 등을 섞어서 도수를 높인 주정강화 와인은 20도가 훌쩍 넘는 경우도 있었다.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계산을 해봐도 대략 한라산 소주 2 - 3병을 1시간도 안돼서 부어 넣었던 거다. 거기에 맥주로 기름칠도 해주고 팩 와인으로 차곡차곡 공구리까지 쳐줬으니 배겨낼 재간이 있나.


숙취로 몇 날 며칠을 고생하고 난 후에는 다들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 술은 자제합시다.

물론 젊은 날의 결심이 그리 오래 지속되던가. 며칠도 되지 않아 한 방에 모여 꼴짝 꼴짝 목구멍을 적셨지만 모두 눈치껏 알고 있었다.

술 도수를 체크하자. 그리고 적시기만 하자. 또 그렇게 술에 절여지면 개지 사람이냐!


그렇게 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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