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커피프린스 1호점이 방영하고 나서였을까. 그전에도 스타벅스 같은 카페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커피라는 음료가 지금처럼 일상에 깊이 자리하진 않았다. 그전에도 커피가 일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커피 믹스 같은 인스턴트 커피 이야기였다. 2007년의 여름이 지나면서 에스프레소 머신이나 핸드 드립으로 추출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조금씩 흔하고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정작 커피프린스가 방영할 적에는 그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1년인가 2년이 지난 후에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커피에 빠져 살게 되는 시작이 될 줄이야. 당시에는 커피 맛을 잘 모를 때였고 커피를 잘하는 집이 어딘지도 잘 몰랐다. 아니 커피를 잘한다는 의미 자체를 모를 때였다. 그래서였을까 나에게 2010년까지 마신 커피는 쓰고, 탄 맛이 나고, 식으면 신맛이 나는 검은색 물 정도였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한다는 건 커피값을 지불한다기보다는 한동안 머물기 위해 자릿세를 내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멜버른은 커피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정확히는 커피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주었다고 할까. 그 시작이자 중심이 된 장소는 멜버른 시내 남쪽에 위치한 센터 플레이스(Centre Place)였다.
폭이 2 - 3미터나 될까 싶은 좁은 거리, 거리의 끝에서 끝까지 왕복해도 2 - 3분이면 충분한 이 골목의 수많은 카페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활기차게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 장소가 더욱 인상 깊게 남아있는 건 사전에 이 골목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 일터다. 이 골목의 맞은편으로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시티 도서관(City Library)이라는 작은 공립 도서관이 있는데, 이 도서관을 구경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처음 센터 플레이스를 마주쳤을 때는 이 골목이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다이애건 앨리 같다고 생각했다. 일상적이고 별 다를 것 없는 길거리라 그냥 지나친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마법의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만 하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마법 같은 그 존재는 강력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서 한 번 발견하고 나면 다시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집이나 학원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방문한 장소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이 센터 플레이스를 꼽을 수밖에.
멜버른의 커피는 어디를 가든 맛있고 훌륭하다. 그럼에도 이 골목에 자리한 카페가 특별한 2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그 작은 골목에 10여 개의 카페가 밀집해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첫 커피와 마지막 커피를 모두 여기서 장식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맛집 골목이 있듯이 이곳을 커피 맛집 골목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거다. 맛집 골목에 가면 하나의 메뉴만 전문으로 하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저 수많은 가게가 같은 메뉴만 팔고 있는데 장사는 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그곳에 있는 가게들은 그 하나의 메뉴로는 모두 웬만한 맛집 수준으로 맛을 내고 또 다들 어느 정도는 장사가 된다.
센터 플레이스의 카페들도 똑같다. 길이가 겨우 30 - 40미터 정도 될까 싶은 골목이다. 그 짧고 좁은 골목에 10여 개가 넘는 카페가 밀집해 있는 거다. 그 바로 앞으로 5미터, 센터 플레이스 입구에서 딱 5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디그레이브스 스트리트(Degraves St.)가 있다. 여기도 카페들이 즐비한데 수를 합치면 20여 개는 족히 되지 않을까.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웬만한 커피 수준으로는 버티지 못할 게 뻔하다. 멜버른을 떠나기 전까지 이 골목에 있는 카페들은 빠짐없이 다녀보며 대부분의 메뉴를 마셔보았는데, 그 어떤 커피도 실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호주의 커피라고 하면 대부분 플랫 화이트나 롱 블랙을 떠올린다. 특히 플랫 화이트는 찰진 질감에 에스프레소와 같은 강렬함을 가져 요새는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매니아층이 생긴 모양이다. 아쉽게도 롱블랙은 아메리카노 때문일까. 찾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첫 커피의 강렬함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카푸치노였다. 달콤하지만 쌉싸름한 시나몬 파우더가 혀 끝에 맴돌 거라는 예상은 우습게 빗나갔다. 그 대신 풍성한 거품 위에 뿌려진 달콤한 초콜릿 파우더가 부드럽고 고소한 우유 거품과 어우러지면서 입안을 가득 채웠다. 알에서 갓 부화한 새들은 처음 보는 대상을 어미로 인식하고 따라다닌다고 했던가. 처음 느낀 카푸치노의 달콤함은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고 그 후로 카푸치노는 내가 호주에서 가장 사랑하는 커피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커피 사랑은 계속되었다. 커피가 맛있다는 카페를 찾아다니며 실망도 많이 하고 겨우 찾아냈다고 생각한 맛집이 다시 가보니 사라지기도 하는 기운 빠지는 일도 많았지만 운이 좋게도 우리나라의 커피 문화는 2010년 이후 꾸준하고도 급속한 발전을 거듭한다.
(스페셜티 커피의 개념이 들어오기 시작한 때와 맞물리며 시너지 효과가 발생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일본으로부터 커피 기술을 배워오던 시대에서 호주를 경험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호주의 커피 문화와 기술 등을 도입하며 트렌드를 선도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어느 동네를 가도 웬만큼 맛있는 커피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커피 문화에 있어서도 다양한 커피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호주는 물론 이탈리아, 미국, 북유럽 국가들의 커피까지 한국에서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덕분에 집안에서도 호주에서 온 다양한 원두를 온라인으로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위에서 소개한 센터 플레이스와 지근거리에 위치한 유명 카페인 듁스 커피(Dukes Coffee)를 포함하여, 멜버른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인트 알리(ST. ALi)와 에이커피(ACOFFEE)가 있다.
시드니에서 온 커피도 빠질 수 없는데, 한국인이 운영하며 시드니 중심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놈코어 커피(Normcore Coffee)와 유명 로스팅 대회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떨친 식스 디그리스(Six Degrees)와 블랙 드럼(Black Drum) 등도 즐길 수 있다.
그 외에도 멜버른과 시드니의 유명세에 치여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지만 맛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레드브릭(RDBK)까지 호주에서도 내로라하는 카페들이 집 앞까지 찾아오는 것이다.
매일 업무에 치이며 에너지 드링크를 대신해 커피를 마시는 게 일상인 직장인이라면 잠시 여유를 갖고 주변을 둘러보자. 지금 서 있는 그곳, 바로 그 옆에 생각보다 맛있게 커피를 내리는 카페가 있을지 모른다. 가끔은 그런 카페에 가서 맛있는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자. 그리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자.
한 잔의 맛있는 커피가 빡빡한 하루의 단비가 되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