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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Aug 16. 2022

180개의 도시락

올드보이

한적한 주말 오후, 점심을 먹고 노곤하니 소파에 누워서 넷플릭스를 틀어보면 드라마든 영화든 무엇 하나 딱 집어 보지 못하고 목적지도 정하지 못한 채 10분이고 20분이고 흘러가는 대로 썸네일만 주구장창 보곤 한다.

여느 때처럼 넷플릭스를 배회하고 있는데 우연찮게 눈에 띈 제목 ‘461개의 도시락’. 그리움인지 트라우마인지 모를 묘한 감정이 들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가족애를 그리는 일본 영화 특유의 잔잔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혼을 한 아빠가 아들을 위해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도시락을 싸주고 시간이 지나며 아들도 아빠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잔잔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내가 생각한 도시락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지만.

나에게 도시락은 올드보이의 만두와 같달까. 15년이나 감금당하며 같은 메뉴만 먹은 건 아니지만 약 3개월간 아침, 점심, 저녁 내내 같은 메뉴의 도시락을 만들어 먹었던 지긋지긋함의 결정체였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사람들은 보통 3가지 중 한 가지는 얻어온다고 한다. 돈, 영어, 여행. 돈만을 목적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사람은 많이 없지 않을까 싶다. 굳이 호주까지 가서 비행기 표값에 숙박비와 생활비까지 더하면 차라리 한국에서 버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기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대다수는 영어를 배우거나 돈을 벌어 여행을 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 일순위 목표는 역시 영어였다.


목표로 삼은 코스는 Cambridge 코스의 FCE 레벨이었다. 정식 명칭은 First Certificate of English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Cambridge 코스 3가지 중 입문 코스이다. 입문 코스라고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중상급 이상의 영어 실력이 필요한 쉽지 않은 수준이다. 그 외에도 상급 수준의 영어 시험인 CAE(Advanced Certificate in English) 코스와 원어민 수준이라고 하는 CPE(Certificate of Proficiency in English) 코스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CAE나 CPE 코스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Cambridge 코스를 선택한 이유라면 순전히 교수님의 추천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전까지는 아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 재학 당시 친했던 교수님으로부터 일상적인 것과 비즈니스적인 내용을 모두 아우르고 영어의 톤과 뉘앙스를 배우고 싶다면 들어봐도 좋을 코스라는 조언을 들은 게 호주행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처음 의도한 바와는 달리 호주를 떠날 때까지 FCE 코스에 이어 CAE 코스까지 수료했다. 난이도로 따지자면 FCE가 중상위 정도이고 CAE는 상위 수준이니 합격한다면 FCE 합격 후 CAE는 아쉽게도 불합격이 흐름상 자연스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FCE 코스에서는 불합격의 쓴 맛을 보고 CAE 코스는 합격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런 이야기라면 보통 어떤 식으로 영어를 공부했는지 그 방법이나 팁에 대한 게 생각나야 하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볶음밥’이다. 3개월 간 평일 5일(가끔은 주말까지) 삼시세끼의 90% 이상을 볶음밥으로 해결했으니까.

사람은 무엇이든 시작할 때면 의욕이 넘친다. 의욕이 넘치는데 필요가 더해지면 그 광기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옛날 표현으로 하자면 이역만리를 떠나온 셈이다. 영어 공부 하나 해보겠다고 그 먼 길을 떠나와 1년을 지내는데 시간이 얼마나 아까웠겠는가.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도 아깝기 그지없었다. 학교를 다닐 때처럼 따뜻한 집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밥도 다 해 먹어야 했는데, 그 요리 시간과 뒷정리 시간도 매일 쌓이다 보면 무시할 수 없었다.


매번 음식 재료를 울월스(Woolworths) 같은 대형마트에서 구매해서 그때그때 만들어 먹곤 하던 중 퀸 빅토리아 마켓과 코스트코를 알게 되었다.

일용할 양식의 보고

퀸 빅토리아 마켓은 멜버른의 부엌이라고 할 수 있는 대형 재래시장이다. 육류, 생선, 과일 등 식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재료를 구매할 수 있는데 특히 마감 시간의 퀸 빅토리아 마켓은 할인의 천국이었다. 운 좋으면 500g 정도 되는 소고기를 5달러면 살 수 있을 만큼 할인을 많이 했다. 매일 소진해야 하는 양이 있는 건지 거의 떨이 상품 처리하듯 가격이 저렴했다.

여기에 코스트코에서 파는 냉동 야채믹스와 소시지가 합쳐지면서 3개월 간의 올드보이 생활이 시작됐다.

레시피는 간단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모든 장을 다 보고 나면 저녁 시간쯤 대형 프라이팬에 5 - 6일 치 볶음밥을 만든다. 빅토리아 마켓에서 사 온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구워서 찹 스테이크처럼 뭉텅뭉텅 썰은 후 볶음밥에 넣기도 하고 소시지를 구워서 볶음밥으로 만들기도 했다. 나름의 변화를 줬다고나 할까. 그렇게 만든 볶음밥을 랩에 싸서 냉동실에 차곡차곡 15 - 18개 정도를 쌓아놓는다. 그리고 매일 하나씩 꺼내 도시락 통에 넣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해외여행하는 기분으로 멜버른을 돌아다니던 것도 잠시 공부에 올인한다며 도시락과 함께 집, 학원, 도서관, 다시 집으로 쳇바퀴 도는 생활을 반복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책을 붙잡고 살았으니 수능 볼 때를 제외하고 제일 열심히 공부한 기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몇 개월을 했건만 FCE는 떨어졌다. 시험이 끝나고도 호주 생활이 7개월 이상 남을 때였는데 남은 기간에 무엇을 할까에 대한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꽤나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그 후로는 조금 자포자기랄까. 공부에 대해서는 조금 내려놓고 말았다. 오히려 아르바이트를 하고 동네에서 사귄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데 좀 더 치중했던 것 같다.


덕분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 기간 동안 여행은 꽤나 다녀왔다. 태즈매니아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즉흥여행으로 다녀왔고 그레이드 오션 로드도 친구들끼리 차를 빌려서 해안선을 따라 차박하며 며칠간 여행했다.

내 생애 최고의 풍경 중 하나

증기 기관차를 탈 수 있는 퍼핑 빌리(Puffing Billy)나 골드 러시 시대를 재현해놓은 소버린 힐(Sovereign Hill) 같이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멜버른 근처의 관광지도 야무지게 찾아다녔다.

기차타고 술 마시러 가자!
황금은 없고...
골드 러시 대신 비어 러시로!

그뿐인가. 멜버른 관광안내소에 가면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파는데 그중 멜버른 시내와 주변의 펍과 바를 소개하는 트럼프 카드 형태의 제품이 있었다. 술집의 이름과 간단한 소개, 거기에 주소와 지도까지 찾아갈 수 있는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 도장깨기 하듯 체크할 수 있는 인덱스 카드도 있는데 술집을 방문하며 하나씩 빈칸을 지워나가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그렇게 두어 달을 보내던 와중에 FCE 수업을 같이 들었던 친구를 카페에서 마주쳤다. 멜버른 시내야 그리 크지 않다 보니 오다가다 보면 아는 얼굴을 한 번씩은 마주치게 마련인데, 이 날의 만남은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에 함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FCE 수업 당시 슬로바키아에서 함께 왔던 커플을 만났다며 이 친구들은 FCE 시험이 끝나자마자 다음 단계인 CAE 수업을 듣고 또 그 후에는 CPE 시험까지 치를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업을 할 때도 워낙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FCE도 그리 쉬운 시험은 아니라고 하지만 Cambridge 코스 3개 중에서는 가장 쉬운 수준이었다. 그조차도 통과 못했는데 누구는 다음 단계를 지나 원어민 수준에 가깝다는 마지막 시험도 바라보고 있다니. 갑자기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질투나 자격지심이 아닌가 했지만 그저 순수한 부러움이었다.


카페에서 그 친구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를 떴다. 한동안 길을 배회했다.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바로 시험 일정을 알아봤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시험을 위한 수업까지 등록할 여유가 있었다. 그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FCE도 통과하지 못한 주제에 더 높은 CAE 시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모한 자신감이었을까. 아니면 우주가 보내는 신호였을까. 이상한 충동에 휩싸여 곧바로 학원을 알아보고 입학시험을 예약했다.


입학시험은 완전히 턱걸이였다. 아니 시험 감독관이 내 읍소를 듣고 구제를 해줬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공부에서 손을 놨다지만 그래도 몇 개월 간 미친 듯이 공부했던 가닥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이게 웬걸... 어려웠다. 테스트가 진행될수록 자신감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다. 마지막 테스트는 스피킹이었는데, 선생님 한 분과 일대일로 대화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정말 간절했나 보다. 이 시험 하나만 바라보고 호주를 온 것이나 다를 바 없는데, FCE 코스는 불합격했고 이제 이 기회가 아니면 1년을 허비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CAE 코스를 공부할 수 있게 제발 기회를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테스트에서 해야 할 대답보다도 간절함에서 나오는 하소연을 거의 5분 넘도록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학생을 보며 그 선생님은 조금 당황한 듯 보이기도 했다.


테스트 결과는 바로 나오니 가지 말고 조금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테스트를 진행한 조그마한 방에서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그리 오래지 않아 테스트를 진행한 선생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그분은 테스트 보느라 고생했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그분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한국말로 자신을 소개하는 게 아닌가.


학원의 한국 학생들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분이었다. 영어로 의사 표현이 원활하지 않은 학생의 경우 학원 생활이나 공부에 대해 필요한 사항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학생 비율이 높은 언어권의 학생들을 담당하는 원어민 담당자가 한분씩 있었던 것이다.

규칙상 학원 내에서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대화하는 건 금지이나 이 사무실에서만은 예외이니 편하게 한국어로 대화를 해도 된다고 했다.

덕분에 긴장을 풀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담당 선생님은 시험 결과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독해 쪽은  큰 문제가 없었고 문법 등은 좀 안 좋으셨다며 조금 애매한 점수였지만 테스트를 진행한 선생님이 의외로 스피킹에 꽤 좋은 점수를 매겨준 덕분에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동양인 학생들의 합격 패턴과는 반대여서 의외라며 재밌어하셨다. 차마 거기서 제가 사정사정하며 하소연 한 덕분인가요 하고 묻지는 못했지만.

이번 회차에 테스트를 봤다가 떨어진 사람들이 이만큼이나 있다며 리스트를 보여주셨는데 백여 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그러면서 보통 한국인은 고사하고 동양인 자체를 찾아보기 힘든 코스인데 합격해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나눴다.


테스트를 합격하고 나니 수업과 본시험에 대한 걱정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도시락을 공수해야 하나 어떤 방식으로 시험에 대비해야 하나 여러 고민을 하며 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수업 날이 되었다.

클래스에 들어온 친구들의 국적은 역시나 다양했다. 브라질, 이탈리아, 베네수엘라 등 유럽에서 남아메리카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그런데 국적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그들의 영어 실력이었다. 이전 코스인 FCE에서도 다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별 문제는 없다고 느꼈지만 이번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웠다. 특히 몇몇은 외국어로서 영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마치 모국어로 말하는 듯 느껴졌다. 선생님들과 말싸움을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저 친구는 굳이 왜 이 코스를 공부하는 걸까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제대로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감이 번지 점프하듯 수직 낙하했다. 하지만 다행히 안전장치가 잘 되어 있었나 보다. 그대로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고 어느 순간 훅 하고 튀어올랐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전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시험 결과도 원하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어 실력도 출중했지만 매너가 좋은 반 친구들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 그들만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정도는 아니다 보니 다소 답답한 순간이 있을 만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너 있게 행동하며 재촉하지 않았다.

그중 베네수엘라에서 온 친구 하나는 동양 무술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 친구와의 대화 덕에 올드보이처럼 칩거하는 대신 조금은 공부를 내려놓고 함께 어울리는 길을 택했다.


베네수엘라 친구는 시험 합격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합격에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시험에 불합격할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고 해야겠다. 그만큼 실력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영어에 대한 본인의 철학이 확고했기 때문도 있다. 진짜 영어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소통하는 데 있지 책만 파며 공부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 CAE 코스를 등록한 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일환일 뿐이었다.

수업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교재를 보고 복습이나 예습을 하기보다는 반 친구들과 대화하는 걸 더 즐거워했고 나에게도 공부만 하기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라며 본인의 철학을 설파했다.


거기에 감화되었던 걸까. 이번에는 FCE 때와는 좀 다르게 행동했다.

가끔은 도시락을 챙겼지만 대부분 함께 수업하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카페를 가거나 식당에 들러 밥을 먹었다.

저녁에도 공부만 하기보다는 여러 친구들을 만나 펍으로 향하거나 혼자라도 펍에 들러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고 쉬던 기간에 별생각 없이 하던 일인데 시험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니 괜히 노는 것조차도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도움이 되었던 건지 시험은 결과적으로 합격이었다. 단순히 놀면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전체적인 영어 능력에 있어서는 FCE 때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FCE 시험을 칠 때에는 그간 공부한 내용이 적절하게 소화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익힌 것을 체화하고 사용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데 시험 후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고 소통한 것이 머릿속에 들어있던 내용을 정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행여 FCE 때처럼 주구장창 공부만 했다면 익힌 것을 소화할 틈도 없이 계속 쌓이기만 해서 오히려 소화불량에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에 와서야 느끼는 거지만 꽤나 열심히 공부했구나 싶다. 다시 하라고 한다면 글쎄… 못할 것 같지만 일과 생활에 치이며 무언가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때면 가끔 그때가 그리워지기는 한다.

그리고 이왕 공부한 거 원어민 수준의 어려움을 자랑하는 끝판왕 코스 CPE를 남겨놓고 오지 않았나. 시리즈물을 보는데 최종화를 안 보면 뒤끝이 찜찜하다. 그러니 이건 나의 버킷 리스트에 넣어두고 언젠가 목적을 이룰 날을 기다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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