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와의 조우
맥가이버를 아는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방영한 꽤 인기 있는 TV 시리즈물이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주변의 도구와 작은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이용하여 적과 맞서 싸우는 모습은 어린아이였던 나에게도 동경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TV 시리즈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라는 이름보다 맥가이버칼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정도니까.
맥가이버는 적과 싸우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면 항상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라는 유명한 대사와 함께 할아버지에게 배운 여러 가지 지식과 기술을 풀어놓는다.
맥가이버가 할아버지에게 매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듯, 나도 여느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하루를 살아도 있을 건 다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평소에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또 이럴 때는 기가 막히게 말을 잘 듣지. 그래서 멜버른에서의 첫 일정은 쇼핑으로 정했다.
다른 숙소를 구하기 전 약 1달간 머무르기로 한 곳은 브레이크프리 벨 시티(BreakFree Bell City Preston)였는데, 멜버른의 시내라고 할 수 있는 중심 업무 지구(Central Business District-줄여서 CBD)까지 가려면 대중교통으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위치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구글 지도가 일상화되어 있는 때도 아니었고 나 역시 당시의 최신 기기나 기술에는 그다지 정통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숙소에서 시내까지 가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전에 알았다면 학원에서 추천해준 프레스턴(Preston) 지역의 숙소 대신 멜버른 시내에 가깝거나 그 안에 있는 숙소를 구했을 거다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알고 있었더라도 벨 시티 숙소를 변경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가보지 않은 장소를 방문할 때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판단을 하는 편이고 1달 정도 지낼 뿐인데 다른 곳을 알아보기 귀찮아서라도 크게 신경 쓰진 않았을 거다. 다행인 건 호텔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면 시간이 30 - 40분 정도로 줄어든다는 것. 덕분에 시간이 맞을 때면 셔틀버스를 자주 애용했다.
첫 외출은 안전하게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30여분을 달리던 버스는 멜버른 시내로 들어섰고,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State Library of Victoria) 옆 쪽에 있는 오먼드 스테츄(Ormond Statue) 앞에 정차했다. 역시 시내가 좋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생기가 도는 분위기에 마음이 들썩들썩했다. 버스가 정차한 바로 앞에 있는 멜버른 센트럴 스테이션(Melbourne Central Station)을 중심으로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쇼핑몰 등이 밀집해있어 신생아처럼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자칫 시내에 온 목적을 잊어버릴까 정신을 차리고 호주에서 유명한 대형마트 울월스(Woolworths)를 찾아갔다. QV멜버른(QA Melbourne) 쇼핑몰 지하에 위치한 울월스는 다행히도 한국에 있는 대형마트와 비슷한 형태의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품목들이야 눈에 익숙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지만 구조라도 비슷한 게 어딘가. 덕분에 조금은 긴장을 풀고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밥솥과 프라이팬에 간단한 주방도구, 옷걸이를 장바구니에 넣고 호주에서 유명한 과자라는 팀탐(TimTam)과 레몬맛 음료수 하나, 저녁용 소고기를 골랐다. 나중에 이 ‘음료수’의 정체를 알고 나서 매우 부끄러워졌지만…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뭔가 계산하는 곳이 이상했다. 줄이 줄어들면서 두 줄로 나눠졌는데 한쪽은 계산원이 있는 쪽으로 다른 한쪽은 사람이 없고 기계들만 줄지어진 곳에 사람들이 물건을 담는 곳이었다. 기계 쪽으로 슬금슬금 밀려가버린 나는 난생처음으로 무인 계산대를 마주했다.
지금이야 이마트든 홈플러스든 어디를 가더라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무인계산대지만 2010년에는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던 미래 문명이었다. 영어도 아직 서투른 상태에서 무인 계산대라는 신문물을 맞닥뜨린 내 머릿속은 말 그대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양 옆에 있는 지역 주민들은(당연히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외국인이었으니까.) 화면을 툭툭 누르고 물건을 찍고 자연스럽게 봉투에 담아 가는데, 나는 홀로 쇼핑 바구니를 기계 옆에 놓은 채 한참을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다.
얼마가 지났을까. 초록색 조끼 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와서 말을 걸었다. 뭔가 말을 하는데 내 귀는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한마디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등에 땀이 흥건해지고 얼굴은 슬금슬금 불타오르면서 툭툭 땀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 마디 더 말을 걸던 직원은 ‘아 이 친구 이거 맛이 갔구나. 말이 안 통하겠다’하는 표정을 짓더니 직접 내 물건을 집고 스캔했다. 어쩌면 땀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운다고 생각한 걸지도…
내게 봉투를 들려주고 물건을 모두 넣어준 다음 계산을 하라며 캐시, 크레디트라고 말하는 듯하길래 지갑에서 바로 현금을 꺼내 건네주었다. 계산을 끝내고 잔돈을 건네주며 돌아서는 직원에게 땡큐만 연발하고 도망치듯 마트를 빠져나왔다.
올 때는 시내 관광이라도 하고 돌아갈 요량이었는데, 짐이 생각보다 많은 것도 그렇고 무인 계산대 앞에서 이미 정신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핼쑥해진 얼굴로 바로 호텔 셔틀버스에 올라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 위에 쇼핑한 물건들을 올려놓고 나니 나름 먹고 살 준비는 된 것 같았다.
여담
위에서 레몬맛 음료수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는가? 과일 주스 중에 레몬을 가장 선호하는 편이라 보이자마자 딱 집었다. 표지 사진도 나름 괜찮고 용량도 2리터였는데 투명한 페트병에 비친 색상이 딱 내 마음에 들었다. Cottee’s Lemon Crush라는 제품이었다. 제품 이름 아래에는 fruit juice cordial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구매할 당시에는 오직 Lemon Crush에만 눈이 팔려서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양손 바리바리 들고 쇼핑하다 보니 목이 말랐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주스를 한 모금 꿀떡 넘겼는데 세상 그렇게 짜릿할 수가. 오해하지 마시라. 마른 목구멍에 탄산 가득한 라거 맥주 한잔을 때려 넣을 때의 그 짜릿함이 아니다. 아주 진한 레몬의 새콤함이 세포 하나하나를 찔러대는 느낌. 마치 벼락에 맞은 듯 머리부터 발 끝까지 곤두서는 느낌이 식도에서부터 퍼져나갔다. 초인적인 의지로 음료를 뿜지는 않았다.
잠깐 생각한 게 ‘역시 서양의 먹을거리는 맛이 진하군. 레몬을 통으로 갈아 넣었나’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꼼꼼히 표지에 있는 글을 읽다가 cordial이란 단어를 발견했다. 그렇다. 나는 물을 타서 마셔야 할 원액을 통으로 원샷했던 거다. 목마름에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가득 마시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에스프레소 트리플 샷을 원샷했던 거지… 모르고 누구에게 대접하기 전에 혼자 먹고 혼자 고통스러워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후로는 장 보러 갈 때마다 상품의 표지나 가격표에 붙어있는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게 되었으니 작은(?) 고통으로 배움을 얻었다며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