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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Jul 14. 2022

그 혹은 그녀의 사정 - 굿바이 투 로맨스

나의 로맨스는 어딘가 잘못되었다 Part2

새로운 장소. 새로운 인연. 새로운 로맨스의 기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잠시… 아주 잠시 했었다.

그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멜버른에 도착한지도 어느새 1주일이나 되었다. 필리핀에서의 짧은 어학연수를 마치고 바로 호주로 넘어왔다. Cambridge FCE 코스라는 영어 시험을 치르기 위함이었다. 3개월 간의 본격적인 수업 일정을 시작하기까지 다행히 며칠의 여유가 있어서 신나게 멜버른 시내를 관광했다. 4-5일 정도 지나자 멜버른 CBD의 풍경이 슬슬 익숙해져 갔다.

이후로도 하루에 한 번은 들렸던 것 같은 페더레이션 스퀘어

주변에 갈 만한 장소가 없을까 하고 여행책을 뒤적여보는데 멜버른 시내에서 트램을 타면 20분 만에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단다.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Flinders Street Railway Station) 앞에서 트램을 타고 세인트 킬다(ST Kilda)까지 가보기로 했다.


조금씩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트램을 타고 유유자적하니 가기를 20여분. 트램 창문 너머로 야자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들이 늘어서 있던 풍경 너머로 일부러 심었다고 생각될 만큼 뜬금없이 야자수가 툭하고 튀어나온 것이다. 본능적으로 여기다 싶었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야자수

트램에서 내리자마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환영 인사를 건넸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었다. 선선한 가을 날씨 같달까. 하늘은 미세먼지 하나 없이 파랬고, 햇살은 선선한 날씨를 달래듯 따뜻하게 내리쬐었다. 20분 만에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청명한 날씨 덕분에 세인트 킬다의 첫인상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4천만 땡겨주고 싶었다.

단정하게 가꿔진 공원을 가로질러 백사장까지 걸어갔다.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인데도 백사장 곳곳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길게 이어진 백사장의 끝은 너무 멀어 보여서 가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여행 책자에서 추천한 세인트 킬다 피어(ST Kilda Pier)에 가보기로 했다. 바다를 향해 곧게 뻗은 잔교는 한눈에 봐도 엄청난 길이임을 알 수 있었다. 좌우 반전된 기억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꺾이는 부분까지 합치면 750미터에 가까운 거리이다. 끝까지 걸어가 해변가를 돌아보면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듯하고 돌아갈 길이 꽤나 까마득하게 보인다.

잠시 걸어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길었다.

잔교는 방파제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장소가 책자에 실릴 만큼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펭귄 때문이다. 성인 남성 팔뚝 길이 정도밖에 안 되는 귀염뽀짝한 야생 펭귄들이 이 방파제를 서식지로 사용하는 것이다. 한참을 걷던 와중에도 그런 사실을 잊고 있던 나는 방파제의 끝자락에서 바다 위를 떠다니는 오리를 보자 펭귄에 대한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순간 펭귄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주변을 찾아봤지만 머리카락 한 올 아니 털 한 가닥도 보이질 않았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펭귄은 해가 질 무렵에나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다고 한다. 그러니 한낮에 아무리 찾아본들 있을 리가. 책에서 읽은 펭귄이란 단어만 머릿속에 넣어놓고 언제 볼 수 있는지는 기억하지 않은 내 불찰이었다. 펭귄 대신 오리 사진을 한 컷 찍으며 아쉬운 마음을 대신하기로 했다.

꿩 대신 닭! 아니 펭귄 대신 오리...


해변가로 돌아오고 나니 다음은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여기에도 도서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디를 여행하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그 도시에 있는 도서관 혹은 책방을 한 번씩은 찾아가 보는 게 별 것 아닌 취미 중 하나라 해변가를 떠나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한 10분쯤 걸었을까. 저 멀리 입을 벌리고 있는 커다란 얼굴이 나타났다. 루나 파크(Luna Park)라는 호주의 테마 파크로 놀이동산 같은 곳인데, 나중에 시드니에서도 다시 한번 마주치게 된다. 지금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한 번쯤 돈을 내고 들어가 봤겠지만 당시에는 외국에 혼자 나가본 것도 처음이고 갓 호주 생활을 시작해 생활비를 아껴야 된다는 생각도 있어서 외관만 쓱 훑어보고 지나갔다. 결국 호주를 떠날 때까지 티켓을 끊어보지 못했는데 지금도 꽤나 아쉬운 마음이 크다.


루나 파크를 지나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은 고즈넉하다고 할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동네 자체가 번잡스럽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마주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저 멀리서 큰 가방을 든 두 명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의 인상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 말을 건 아프로 머리(풍성한 곱슬머리 스타일)의 청년은 나에게 강렬한 기억을 선사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프로모션 행사를 하듯 해외에서도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음료 등의 제품을 나눠주며 행사를 하는가 보다. 그 둘은 BIG M EGG FLIP LIMITED EDITION이라고 적힌 제품을 보여주며 말을 걸었다. 무료로 프로모션 행사 중이라며 맛을 보고 감상을 말해달라던 그 친구들의 요청에 별생각 없이 흔쾌히 허락하고 그 자리에서 한 모금을 꿀꺽했다.

1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음료...

지금보다 10년은 어릴 때라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덜할 때여서 아무런 의심 없이 먹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료를 아무 생각 없이 마시는 건 그다지 추천할만한 행동은 아니다. 내 경우야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는 착한 친구들을 만난 거라 다행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우 그렇게 흔쾌히 먹으란 말을 해주고 싶지는 않다.


여하튼 달걀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좀 비리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 맛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외국인에게 관심이 있는지 어디에서 왔냐, 무슨 일 때문에 이 먼 호주까지 오게 됐냐 등등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나 역시 영어 실력을 늘리는 게 호주에 온 목적인 만큼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싶어서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야 오후 내내 아무런 일정도 없으니 여유롭게 이야기를 이어가도 되는데 이 아프로 친구는 일을 하는 와중에 이렇게 오랫동안 수다를 떨어도 되나 생각할 만큼 일하러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동료는 슬슬 몸을 틀며 가야 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괜히 나 때문에 시간을 버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려 했다.


헤어지는 게 아쉬웠는지 저녁에 맥주라도 한 잔 하러 가자며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했다. 아까 전부터 머릿속 저 안쪽에서 알게 모르게 조용히 울려대던 삐… 삐… 소리가 조금씩 음을 높여가며 그 간격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호주에 와서 잠시 잊고 있었던 게이다가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딱 짚을 수는 없지만 대화에서 느껴지던 미묘한 뉘앙스와 맥주 한 잔에 초대하며 팔뚝을 어루만지던(?) 애매한 터치에 정신이 번쩍 났다.


필리핀에서는 외모라도 여자분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형인가(동생일지도 모르지만) 싶어서 잠시 슬퍼졌다.

제안은 매우 고맙지만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내기가 힘들 것 같다고 에둘러 거절했다. 아프로 친구는 매우 깔끔하게 이해한다며 호주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갈 길을 갔다.

순간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남자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을. 갑작스럽게 들어온 낯선 남성의 관심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포용력을 갖추지 못했던 때이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술자리를 거절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나의 성향을 솔직히 말하고 친구로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에는 아직 그런 융통성도 부족했던 거다.


그 후로 몇 번인가 자잘한 관심을 받은 적도 있었다. 모두 남자였다는 게 문제지만… 외국에서는 나에게 허락된 인연이 없나 보다 싶었는데 역시나 떠나는 날까지 내가 꿈꾸던 로맨스에는 근처도 못 가보고 호주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오히려 호주를 떠나기 바로 직전에 전혀 생각지 않았던  거대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건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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