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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Jul 28. 2022

그 혹은 그녀의 사정 - 라스트 댄스

나의 로맨스는 어딘가 잘못되었다 Part3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여행을 떠났으면 돌아와야 할 날이 있는 법이다. 일 년 남짓했던 호주 멜버른 생활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목표로 했던 Cambridge 코스의 시험 결과는 호주를 떠난 후에나 나올 예정이라니 마음을 졸여서 뭐하겠는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목표 달성에 성공했는가는 미지수였지만 하기로 마음먹었던 일은 거의 다 해본 듯싶었다. 원했던 영어 시험도 봤고(Cambridge FCE에 더해 CAE까지), 여행도 꽤나 다녔고(여권 도난으로 인한 강제 여행도 포함이긴 하지만…), 아르바이트로 일도 이것저것 경험해봤다.

해야 할 일도 더는 없어서 미련이 남을 만한 것도 없을 텐데 출국일까지 어중간하게 남은 며칠간의 여유가 괜시리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멍하니 시간을 낭비해봤자 뭐하나 싶기도 하고 떠나고 나면 다시는 못 올 수도 있는 도시인데 가기 전에 한번 더 눈에 담아보자 싶기도 해서 1년 간 지겹게 돌아다니며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고 느껴졌던 길거리를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걷기 시작했다.

괜히 아련한 기분이었다. 1년 가까이 지내다 보니 처음 왔을 때의 흥분과 설렘은 익숙함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였고 한 군데라도 더 보고 싶어서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던 길도 목표로 한 공부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출퇴근길처럼 단순해져 버렸다. 막상 떠날 날이 가까워져서 새삼스레 눈앞의 풍경이 특별하게 보이다니 이래서 사람이 간사하다고 하는 걸까.

조명마저 아련아련

호주를 떠나기 전날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과 시험 마무리 축하 겸 송별회로 호주 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날까지 이렇게 조금은 아쉽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또 아련함을 갖고 평화롭게 호주 생활을 끝마칠 예정이었다. 그래야 할 터였다. 그런데 왜 떠나는 전날까지 세상은 시련을 던져주는 것일까. 로맨스 같은 거 포기했다니까 그러네…


드디어 호주를 떠나기 전날이 되었다. 페더레이션 스퀘어 건너편에 위치한 영국식 펍에서 모두를 만났다. 널찍한 홀에는 여러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기다란 바에는 신선한 생맥주를 뽑아내는 탭이 여러 개 줄지어 있었다. 그날은 무슨 일인지 한쪽 공간에 마련한 무대에서 라이브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고 테이블 사이사이에서 사람들이 선 채로 맥주를 즐기며 음악 소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춤을 추는 건 그다지 취향은 아니지만 앉을 자리도 부족하고 친구들 수도 여럿이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테이블 사이 빈 공간에서 술을 즐겼다. 마지막 날이라고 마음이 풀어졌는지 한참 동안 술을 들이키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은근히 취기가 올랐다.


한참을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공연하는 곳을 빼면 다소 어둡긴 하지만 이렇게 어둡진 않았는데 이상하게 등 뒤로 그림자가 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이게 뭔가 하고 돌아봤는데… 처음에는 벽인 줄 알았다. 한참 테이블 사이에 있었는데 내가 술이 많이 취했나 싶어 다시 눈을 씻고 봤더니 웬 남자 가슴팍이 눈앞에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맥주병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릴 뻔했다.

아니 사람 가슴팍을 본 정도로 뭐 그리 놀라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필자는 성인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서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가슴팍을 볼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키가 190에 가까우니까.


해외에 나가면 너만큼 키 큰 사람이 수두룩 빽빽하다 라는 말을 듣고 나왔는데 호주에서 생활하면서 비슷하게 큰 사람은 좀 봤지만, 나보다 큰 사람은 쉽사리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가슴팍을 볼 정도로 큰 사람이라니… 맨 정신도 아니고 술 취한 상태라면 기겁할만하지 않은가.

게다가 덩치는 얼마나 크던지 왕좌의 게임에 나온 거산(The Mountain)이라는 인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앞뒤 양옆으로 내가 2명씩은 들어갈 것 같았으니까.


이런 형(덩치 크면 형이다)을 만났을 때는 모른 척 내 할 일을 하는 게 최고인데, 이 형이 자리를 뜨지 않는다. 아니 나를 계속 보고 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행여 그렇다 해도 말은 걸지 말아주세요 라고 기도했건만 어디 운명이 그리 친절하던가.


같이 춤을 추잔다… 형이랑 커플 댄스를 추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요… 아마 평생 안될 수도 있어요 하는 말이 차마 목구멍을 뚫고 나오진 못 했다. 생존 본능이랄까… 이건 이미 게이다가 울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순결(?)을 잃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처럼 느껴졌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구경을 했다. 그 형도 같이 온 친구들이 2명 정도 있었는데, 어느새 양 팀이 말을 섞고 있었다.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일각이 여삼추처럼 느껴지던 그때 상대 친구 중 한 명이 베네수엘라에서 온 내 친구의 셔츠를 잡아 뜯어서 단추가 다 날아가버렸다. 순간 나도 덩치 큰 형도 다른 친구들도 모두 날아가는 단추를 바라보며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이미 술이 꽤나 취했던 그 친구는 신난다고 내 친구를 붙잡고 춤을 추다가 흥분을 못 이기고 그런 민폐를 저지른 거다.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휘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고 내 친구는 정색을 하며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따졌다. 덩치 큰 형도 적지 않게 당황했는지 미안하다며 술 취한 친구를 떼어냈다.


보통 이런 일로 분위기가 싸늘해지면 기분이 다운되기 마련인데 그때의 나로서는 이때가 기회다 싶었다. 어서 자리를 옮기자며 친구들을 부추겼다. 덩치 큰 형은 몇 마디 말을 더 하며 붙잡아 보고 싶었던 것 같지만 잘못이야 그쪽이 했으니까. 맘 편하게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래도 별 일 없이 보내준 걸 보면 나름 순박한 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다. 커다란 형이 나타난 덕분에 정신도 없었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함께 해준 친구들도 있어서 그 시간만큼은 아쉬운 마음을 유쾌한 기분으로 덮을 수 있었다. 모두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스완스톤 스트리트(Swanston St.)를 거슬러 올라가다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앞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새벽에도 도서관의 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환하게 배웅해주는 도서관을 보니 울적해질 뻔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래 다시 올 것이다. 여행일지 아니면 또다시 공부를 하러 올지 모르겠지만 왠지 다시 보리라는 예감이 든다.

하지만 그때는 다시 로맨스에 휘말리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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