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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Jul 05. 2022

어쩌다 마주친 예술의 성, MONA

태즈매니아 스토리 Part 1

전면이 통유리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아래를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지듯 조금씩 어둑해졌던 엘리베이터의 밑바닥에서 빛이 솟아 올라왔다. 통유리 너머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단면이 나타났다. 언뜻 봐도 건물 3 - 4개 층은 넘을 듯한 높이였다. 전혀 알지도 못했던 존재의 거대한 실체를 마주한 것처럼 얼굴을 통유리에 갖다 댄 채, 엘리베이터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꿈꿔왔던 비밀기지 같은 미술관. MONA(Museum of Old and New Art)와의 첫 만남이었다.


즉흥 여행만큼 정신없이 신나는 여행은 없을 거다. 호주에서 반년 가까이 지내던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호주 남쪽에는 하트 모양의 섬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신기한 섬이라면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어떻게 그렇게 충동적으로 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름신이 내려오는데 때와 장소를 가리던가. 근데 그때는 몰랐다. 그 섬 크기가 우리나라의 2/3만큼이나 될 줄은… 비행기 창 밖으로 하트 모양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높이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섬의 전체 모양을 보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 좌절했다.


훌쩍 떠나온 여행이었기에 숙소도 호스텔의 다인실로 겨우겨우 잡고 여행 정보도 하나 없어 도착하자마자 여행 안내소에 도착했다. 별다른 계획이 없어서 안내소 직원의 추천을 받아 눈에 띄는 일일 투어를 2, 3개 정하고 나니 당일에는 할 일이 없었다. 오후에 볼 만한 게 없을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같은 초콜릿 공장이 있다는 거다. 호주에서 생활하며 들어봤던 브랜드 같기도 하고 영화에 나오는 그런 공장을 구경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 싶어 한 번 가보기로 했다.

태즈매니아의 풍광을 좀 더 가깝게 느끼고 싶은 마음에 자전거를 빌려서 떠나기로 했다. 자전거로 찾아가는 방법을 듣고 떠나려는데, 가는 길에 미술관도 있으니 시간이 나면 들러보라고 귀띔해주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인지라 대충 귀에 담아두고 초콜릿 공장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목가적인 타즈매니아의 풍경.

강줄기를 따라 깔끔하게 정비된 자전거 길을 탔다. 자전거를 타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햇살이 쨍쨍했다면 자전거를 타고 가다 중도 포기하고 돌아왔겠지만 적당히 구름도 껴서 선선한 날씨였다. 중간중간 길을 벗어나 강가에 있는 놀이터에서 음료수 한 잔을 마시며 쉬기도 하고, 도심에 들어서 햄버거를 사 먹기도 했다. 동양인이 거의 오지 않는지 한결같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길을 묻기 위해 다가가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하나같이 친절하게 웃으며 도와주기 위해 애썼다.

심플한 입구 디자인

1시간여를 달리던 중, 강 너머 멀리 무언가가 눈길을 끌었다. 수많은 전투를 거치고 헤져버린 성곽처럼 거친 속살을 드러낸 녹슨 건물이었다. 안내소 직원이 말한 미술관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시간도 많으니 둘러보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입구에 적힌 심플한 MONA라는 이름에 뉴욕의 MOMA 미술관이 떠올랐다. 포도밭이 이어진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며 살짝 기대에 부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부지가 꽤 컸다. 미술관을 찾기 위해 한 바퀴를 돌아봐도 보이는 건 식당처럼 보이는 2층짜리 건물 두어 개와 넓은 광장, 강가를 조망할 수 있는 쉼터 정도였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취해 한잠 청했으면 좋았겠다.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싶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강가가 내려다보이는 의자에 앉아 지친 다리를 주물렀다. 일어나 가려는데 저 멀리 거울처럼 반짝이는 네모난 작은 건물이 보였다. 문 앞에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계속 서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가까이 다가가 혹시 이곳에 미술관이 있냐고 물어보니 발랄한 목소리로 여기가 맞다며 재미있게 즐기라고 웃어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면 디스플레이에 ‘Museum of Old and New Art’라는 글자가 띄워져 있었다. 올바르게 찾아왔음을 확신하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안내데스크와 보관함, 엘리베이터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방을 맡긴 확인증과 내부 안내용 앱이 설치된 아이팟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신세계로 내려갔다.

어떻게 지하에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까.

지하 세계에 지어진 미술관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지상의 넓었던 부지를 그대로 지하에서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천장까지 높다랗게 닿은 절벽을 만져봤다. 거칠고 탄탄한 표면이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왔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들뜬 마음에 하나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왜 아이팟을 받았는지가 떠올랐다.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목에 걸었던 아이팟을 손에 쥐었다. 그때부터 조금 더 깊이 있게 미술관을 즐길 수 있었다. 아이팟에는 'The O'라는 앱이 깔려 있었다. 이 앱은 미술관 안에서 내가 이동하는 장소마다 주변에 있는 그림이나 조형물을 파악했다. 원하는 미술품을 선택하면 다양한 배경지식과 이야기, 에세이, 음악, 인터뷰 등을 들려주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지만 다양한 설명을 들으며 미술품을 구경하다 보니 난해해 보였던 모습들이 조금씩 이해되며 작품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회화는 물론이고, 각종 조형물, 현대적인 미술품에 비디오 아트까지, 익숙하지는 않지만 알고 나면 감탄을 자아내는 다양한 작품들이 있었다. 특히 독일의 예술가 줄리어스 팝(Julius Popp)의 'bit.fall'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등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설치 작품인데 수백 개의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매번 다른 단어를 보여주는 신기한 작품이다.

Sleep

미술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다시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섰다. 기다리는 내내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지상으로 돌아왔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색이 달라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해가 저만치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부랴부랴 초콜릿 공장을 향해 다시 페달을 밟았다. 20분 정도를 쉬지 않고 달려 공장 문 앞에 다다랐지만 이미 문을 닫았는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쉬운 맘은 들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아 가벼운 마음으로 호바트 시티를 향해 바퀴를 굴렸다.

아쉬운 마음에 정문이라도 한 컷

후에 안 사실이지만 호바트 시티에 있는 페리를 타면 25분 만에 미술관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다 해도 나는 자전거로 미술관을 방문할 것 같다. 미지의 장소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며 느끼는 두근거림. 그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과 풍경까지 모두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으니까.

언젠가 또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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