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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준 Jul 09. 2022

원웨이 티켓 - 그 미소의 의미

태즈매니아 스토리 Part3

이상하게 여행을 가면 선택한 여행지나 도시를 제쳐두고 주변 관광지를 더 집중적으로 여행하는 습관이 있다.

서울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면 숙소는 서울로 잡아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부터 인천, 파주, 청평 등을 연이어 돌아다니는 거다. 그러다 보니 어떤 여행에서는 정작 가기로 했던 도시의 숙소 주변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돌아본 동네가 없는 경우도 생긴다. 굳이 장점을 만들어 이야기하자면 처음 정했던 여행지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에 재방문 의지가 매우 높아진다는 정도랄까.


태즈매니아를 여행할 때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3박 4일 중 첫째 날, 둘째 날, 넷째 날은 모두 주변의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셋째 날만 호바트 시내에 머물렀다.

그나마도 하루 정도는 시내를 돌아봐야 태즈매니아의 주도인 호바트에 다녀왔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 관광안내소에서 소개받은 장소를 추리고 추린 결과였다.


굳이 셋째 날을 시내 관광으로 정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매주 토요일에만 들어서는 살라망카 마켓(Salamanca market). 새로운 도시를 갈 때면 시장, 도서관, 공원 셋 중 하나는 들르려고 하는 편인데, 상설시장이야 언제든 시간 날 때 가면 되지만 정해진 날짜에만 여는 정기시장이라니. 그 희소성 때문이라도 놓칠 수 없는 선택지가 아닌가.


오전에는 시장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호바트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마운틴 웰링턴을 찍고 내려와 호바트 주민들이 사는 동네를 천천히 걸어 다니기로 결정했다.

평화로운 도시 풍경만큼 시내 여행도 평온하게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뭐하나 쉽게 지나가는 법이 없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되는 하루가 될 줄이야.


살라망카 마켓은 마치 영화 ‘노팅힐’의 첫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인 휴 그랜트가 소개하는 노팅힐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주말만 되면 아침 일찍부터 수백 개의 좌판이 나타나 도로를 가득 메운다는 영화 속 노팅힐의 거리처럼 마켓이 들어선 토요일의 살라망카 마켓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백 개의 좌판이 살라망카 플레이스를 가득 채웠다.

노팅힐의 한 장면 같던 살라망카 마켓

수백 미터를 늘어선 좌판에서는 지역 공방에서 제작한 아름다운 공예품을 선보이기도 하고 신비로운 골동품을 진열해놓기도 했다. 지역 주민이 직접 만든 향긋한 음식 냄새는 식사에는 무심하던 관광객의 발길조차 느려지게 하고 신나는 음악 소리는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아버지의 연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딸일까?

보통 관광지에 자리를 깐 좌판을 살펴보다 보면 대부분 어디선가 본 듯한 상품을 팔기 마련이다.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라거나 나무로 만든 신기한 와인 거치대, I♥︎NY 시리즈 같은 티셔츠 등 관광기념품이긴 하지만 꼭 살 필요가 있나 싶은 것들 말이다.

물론 살라망카 마켓에서도 그런 종류의 기념품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리적인 이유 때문일까. 지역색이 강한 기념품과 쉽게 보기 힘든 수공예품이 꽤나 눈길을 끌었다. 태즈매니아에 서식하는 태즈매니아 데빌을 모델로 만든 인형과 장식품이 다수 있었는데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울음소리가 꽤 끔찍하니 실제 동물을 키우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트 모양인 태즈매니아 섬을 그대로 본뜬 벽시계도 있었는데 크기만 작았다면 하나쯤 사지 않았을까?

나무의 성

무엇보다 나무로 만든 공예품 중에 매력적인 제품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살바도르 달리를 오마주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흐물흐물한 느낌의 곡선이 매력적인 탁상 서랍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칸짜리부터 여섯 칸짜리까지 다양한 디자인이 구비되어 있었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내 관심을 잡아끈 건 서랍 안 쪽에 있는 비밀 공간이었다. 첩보 영화 같은데 보면 나오는 이중 서랍이라고 해야 하나? 비상금이나 얇은 노트 정도는 숨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옵션에 지름신과 접신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행지마다 여행 마그넷을 사 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쇼핑을 거의 하지 않는 타입이다 보니 관성에 따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국 구매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왜 안 사 왔는지 후회막심이다. 크기가 좀 크긴 하지만 쉽게 보기 힘든 기념품이고 무엇보다 비밀 공간이라니! 낭만이 있지 않나. 비상금도 숨길 수 있고… 지금이야 늦은 후회이긴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지 않게 나름 일찍부터 구경을 시작했는데도 흥미로운 상품에 하나하나 눈을 뺏기다 보니 어느새 점심을 지나고 있었다.

조금 더 시장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오후에는 마운틴 웰링턴 전망대로 올라가는 차를 예약해놓은 상태여서 점심은 시장에서 산 애플파이로 대신하고 대기하는 장소까지 이동해 차를 기다렸다. 여러 장소를 돌며 왔는지 이미 몇 팀을 차에 태워 온 상태였다. 운전사에게 예약 번호를 확인받는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원웨이? 원웨이 온리?”라고 물어본다.

마운틴 웰링턴 높이가 1,270미터이니 전망대만 해도 낮은 높이는 아닐게 확실했다. 힘들게 올라가는 건 그만두고 차를 타고 간편하게 올라간 후 내려올 때는 천천히 경치를 구경하며 내려올 심산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말 편도로만 이 차를 사용할 거냐고 두세 차례 묻던 운전자는 상당히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며 나를 태우고 산을 올라갔다.


시내를 빠져나온 차가 산 밑에서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데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양옆으로 나무가 빽빽하게 솟아있는 좁은 도로를 올라가는 동안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차량이나 자전거 등을 지나쳤다. 개중에는 걸어서 내려오는 등산객도 몇몇 볼 수 있었다.

차로 지나가며 슬쩍 봤을 뿐이지만 걸어서 내려오던 이들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은 게 좀 이상했지만 그 이유를 알 리가 있었겠는가. 눈에 들어온 그 표정은 별다른 임팩트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길 옆에 솟아 있던 울창한 나무들이 이가 빠지듯 듬성듬성해지며 슬쩍슬쩍 도시를 비추더니 어느 순간 시야를 가리던 나무가 깨끗하게 사라지며 도시 너머 바다까지 시원한 풍경이 펼쳐졌다.

순간 추위도 잊을 만큼 장엄했던 풍경

전망대 주변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감탄하며 차 문을 여는 순간... 냉기를 품은 바람이 차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전망대 주변으로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바람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2월의 호주는 아직 여름의 열기가 가시기에는 한참 이른 시기이다. 당연히 복장도 얇을 수밖에. 아침저녁의 다소 쌀쌀한 공기를 막기 위한 바람막이 정도를 제외하면 추위를 대비한 옷가지는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랬는데 해는 두터운 구름에 가려 코빼기도 안 비치고, 바람은 귀싸대기를 날리듯 온 몸을 강타했다.

살려줘...

이미 차비까지 내고 올라온 판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고 일단 전망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전망대 건물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아담한 건물이라 추위를 피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유리 너머 펼쳐진 호바트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아주 잠시였지만 폭풍 같던 바람을 잊을 수 있었다. 맑은 날이었다면 말을 잊을 만한 풍경임이 틀림없었다. 산 위아래로 구름과 안개가 끼어 흐릿한 날임에도 도시와 바다 산이 어우러진 장대한 풍경에 잠시 넋을 놓을 정도였으니까.


추위를 피한 덕분에 체온도 좀 회복했겠다 마음껏 둘러보며 그 경관을 눈에 담고 싶었다. 전망대 건물에서 나와 나무로 된 데크를 좌우로 옮겨 다니며 전망대를 만끽했다.

슬슬 풍경이 눈에 익어갈 때쯤 다시 추위가 찾아왔다. 전망대 부지는 꽤 넓었고 바람막이가 되어줄 만한 구조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난당한 등산객마냥 몸이 쪼그라드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거다.

황량...

슬슬 내려갈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 추위를 참으며 산을 내려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기만 해도 1시간은 훌쩍 넘게 걸릴 길인데 자살행위가 아닌 다음에야 준비도 안된 복장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제야 운전기사의 그 애매한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시간까지는 여유가 조금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끌고 주차된 차로 달려갔다. 이미 차에는 올라올 때 탔던 사람들이 돌아가기 위해 그대로 탑승한 상태였다. 운전기사에게 내려가는 차를 탈 수 있겠냐며 묻는 와중에도 이가 제멋대로 부딪치며 딱딱거리는데 그 몰골이 내가 봐도 가관이었을 터다. 차에 탄 모두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안쓰러운 듯 자리가 남았으니 괜찮지 않으냐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는데, 그는 당연히 그러려고 했다는 듯 어서 타라고 말해주었다.


내려가는 내내 따뜻하게 틀어진 히터에 노곤하게 몸을 녹였다. 실제로는 채 1시간도 머무르지 않았건만 정상까지 등반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초췌한 몰골이 되었으니 실은 바람 대신 세월을 정면으로 맞은 게 아니었을까.


호바트 시내에 도착한 후 요금을 정산하며 ‘구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전망대에 놓고 갔다면 정말 조난당한 관광객이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는 웃으며 별 거 아니라며 남은 관광도 즐겁게 하라고 인사하면서 떠났다.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 전문가의 말을 따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에 새기며 남은 호바트 시내 관광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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