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품질 평가 항목과 심각도 수준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나면 성적표를 받듯이, 번역을 납품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LQA 리포트를 받게 된다. LQA는 Language Quality Assurance의 약자로 번역 품질의 수준과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리포트에는 번역 품질의 합격 여부와 점수, 평가 기준이 되는 항목 등이 포함되는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번역 품질 평가 항목
업체마다 분류하는 항목에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항목을 8가지 정도로 살펴보려고 한다.
1. 문법과 맞춤법
생각보다 많은 번역가가 맞춤법을 틀린다. 맞춤법 검사기를 돌려도 100% 확신할 수 없는 경우는 이해할 수 있지만 '되다'나 '돼다', '안-'이나 '않-'처럼 기본적인 맞춤법을 틀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생각보다 자주 보이는 맞춤법 문제는 지식적인 문제가 아닌 경우도 꽤 있다. '~을 했다'처럼 받침에 쌍자음이 들어갈 때 시프트 키를 누른 채로 타자를 쳐서 '~했따'로 입력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실 이런 맞춤법이나 오탈자는 맞춤법 검사기를 한 번만 돌려보면 쉽게 잡아낼 수 있는 오류기 때문에 번역 실력과는 별개로 해당 번역가를 그다지 꼼꼼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법적으로도 몇 가지 오류를 볼 수 있는데, 먼저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짧은 문장에서는 거의 없지만 문장이 길어지면 생각보다 자주 보는 오류이다. 한 예로 '회사로부터 건강 검진비 및 도서 구입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같은 문장을 보면 주어의 조사와 서술어가 호응하지 않기에 '회사에서 ~를 지원하고 있습니다'라거나 '회사로부터 ~를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정도로 수정해야 한다. 또 구조어가 호응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유를 설명하기 위해 '왜냐하면 비가 많이 내려 도로가 막혔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을 써야 하는데 '왜냐하면 비가 많이 내려 도로가 막혔습니다'처럼 호응하지 않는 문장을 구사하기도 한다. 번역한 후 한 번만 더 훑어보거나 읽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문법적 오류들이 많아 상당히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다.
2. 오역
인터넷을 봐도 많은 오역 사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인 차이나 중의적인 단어 사용으로 인해 원문을 잘못 파악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혹은 '~을 해야 합니다'를 '~을 하면 안 됩니다'로 번역하는 것처럼 명백히 잘못 번역된 경우 당연히 오역으로 잡힌다.
그런데 정확하게 번역되지 않아 뜻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오역으로 잡힐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 경우 뜻은 통하지만 적절하지 않은 번역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Thank you'를 번역할 때 고객을 상대하는 기업이라면 보통 '감사합니다' 혹은 '고맙습니다'로 번역해야 함에도 당당히 '고맙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면밀히 따지면 오역은 아니지만 분명 잘못된 번역이다. 문장이 들어가는 위치나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번역하면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3. 용어
휴대폰, 테이블, TV, 고객, 침대, 방 등등 세상에는 수많은 용어가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지칭하는 물건, 그 물건을 이루는 부품, 소재 이 모든 것에는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용어가 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있다. 휴대폰과 핸드폰 어느 쪽이 맞는 용어일까. 무엇이 표준어인지 확인해볼 필요는 없다. 둘 다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으니까. 둘 다 맞다면 어느 용어를 사용할지는 번역가에게 달린 걸까? 아니다. 적어도 용어집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용어집은 번역할 때 선택해야 하는 용어들을 담고 있다. 휴대폰과 핸드폰처럼 둘 다 맞는 상황에서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고객이 그동안 번역한 내용과 호응할지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문서에서 휴대폰이라고 번역한 고객의 문서에 갑자기 핸드폰이 등장한다면 문장의 일관성을 해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광고해야 하는 상품의 이름을 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4. 문장 완전성
- 단어, 문장 등을 임의로 누락하거나 추가하기
영화관에서 자막을 보다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가? 아니 주인공은 저렇게 끊임없이 떠들어대는데 자막은 왜 이렇게 짧아? 대부분의 경우 느낀 대로가 맞다. 영화 자막의 특성상 중요한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를 날려버린 것이다.
짧은 시간에 내용을 전달해야 하는 영화 자막은 이런 식의 누락이 가능하지만 문서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문서 번역을 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단어나 문장 등을 임의로 누락하거나 추가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원문을 건드는 일이니까. 물론 절대적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언어마다 있을 수 있는 차이로 인해 다소의 누락이나 추가는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경우 왜 누락이나 추가가 일어나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번역하지 않고 남아있는 원문
번역할 원문을 남겨두는 건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다. 오역이나 용어처럼 살펴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눈에 띄니까. 그런데 가끔 그대로 남겨놓고 전달하는 분들이 있다. 실수로 소량의 문장을 남기는 경우는 별문제가 아니다. 마저 번역하면 되니까. 다만, 가끔 '도저히 번역을 못 하겠어요'라며 남겨 오시는 분들이 있다. 이런 행동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는다.
- 번역하지 않아야 하는데 번역된 부분
번역을 한다면 원문의 모든 부분을 번역하는 것이 맞다. 다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는데 고객 지침이나 스타일 리스트에 DNT(Do Not Translate)로 명시된 부분은 원문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번역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모든 글을 번역하게 되니 DNT가 있는 문서는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처리하자.
5. 스타일
스타일 가이드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고 적용한다면 큰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는 항목이다. 다만 번역 실력 등의 문제로 직역에 가깝게 번역을 하는 경우에는 스타일 항목에서 점수가 깎일 수 있다. 짧은 한 문장 정도는 그다지 티가 나지 않지만, 긴 문장이나 복문으로 쓰인 경우에는 직역으로 번역하면 가독성이 떨어진다. 자칫 구글이나 파파고 번역을 사용한 것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첨언하자면 요새 구글이나 파파고 번역도 상당히 자연스러워졌다. 부디 구글 번역기보다 한국어를 못 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기 바란다.
6. 일관성
하나의 용어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번역하거나, 이미 번역한 문장을 다른 스타일로 번역하는 경우 일관성에서 점수가 깎인다. Mobile Phone을 번역할 때 용어를 정해주지 않으면 휴대폰, 핸드폰, 휴대전화 등 몇 가지 용어를 섞어가며 번역하게 된다. 특히 앱이나 시스템 UI에서 용어를 중구난방으로 번역한다면 사용 고객에게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그러니 고객의 용어집이나 기존 번역을 참고하여 용어에 혼선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7. 지침 준수
번역 작업을 받을 때 번역할 원문만 받는 경우는 드물다. 적어도 작업 관련 사이트나 기본적인 지침 정도는 함께 전달받는다. 어느 정도 체계화된 작업을 받는다면 스타일 가이드와 용어집, 고객 지침, 참고 자료 등을 함께 받게 되는데 여기에 기존 작업에서 나왔던 고객 피드백이 더해지기도 한다. 결국 전달받은 자료를 꼼꼼하게 숙지하고 번역한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는 항목이다.
8. 원문 소스 오류
원문 소스 오류는 명확히 잘못된 정보가 원문에 적혀있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남산 타워는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이다'처럼 원문의 사실 여부가 잘못 명시되거나 원문의 문장이 올바르지 않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원문 소스 오류는 번역 단계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은 아니기 때문에 오류로 잡히더라도 번역 점수에서 마이너스가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누가 보더라도 잘못되었다는 점이 확실하다면 잠깐 시간을 내어 지적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번역 오류의 심각도 수준
위에서는 성적을 평가하는 항목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항목마다 어떤 성적을 받게 되는지 확인해보려고 한다. 이 오류의 심각도 수준(Severity Level)은 총 5단계로 구분된다. 이중 점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항목은 Critical, Major, Minor 3가지이며, Preferential과 Repeated는 부수적인 부분이다.
1. Critical
가장 심각한 수준의 오류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브랜드나 제품의 이름을 틀렸다거나 숫자를 틀려서 날짜나 가격이 잘못 책정되는 경우, 주요 내용의 누락, 오타, 잘못된 통화 심벌 사용 등이 있다.
세부적인 예를 들지 않고 보더라도 얼마나 심각한지 감이 오지 않는가? 2020년 1월 1일 런칭하는 제품을 2020년 11월 1일 런칭으로 번역한다면 대형사고다. 번역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단순한 숫자 옮기기 작업에서 이런 실수가 나온다니 믿기 힘들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숫자 오류는 굉장히 자주 나온다.
이 외에도 법률이나 의학 관련 번역에서 주요 용어를 잘못 번역하는 것도 심각한 오류로 분류된다. 계약과 관련된 법률 문서도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직접적인 안전과 관련된 의학 문서에서 용어가 틀린다면 사용자나 환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니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Major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수준의 오류이다. 구조어 오류처럼 문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형태의 문장을 사용하거나 문장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번역하는 업체의 분야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여 혼선을 일으키는 경우, 구두점을 마침표 대신 쉼표를 넣는다거나 번역하지 말아야 할 용어(DNT 용어)를 번역하는 경우, 스타일 가이드와 다른 어조를 사용하는 경우 Major 오류로 분류될 수 있다. 특히 웹사이트의 첫 페이지처럼 눈에 띄는 문장에서 발생해서는 안 되는 오류이다.
3. Minor
오류로 인정되지만 번역된 내용을 파악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이 Minor로 잡힌다. 그다지 가독성이 좋지 않아 글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고, 주요하지 않은 내용이 누락되었거나 이중 공백, 이중 구두점 등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4. Preferential
번역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경우이다. 스타일 가이드나 지침 등도 준수하게 지켜 오류로 잡을 필요는 없으나 수정한다면 번역을 질을 더 높일 수 있는 부분이다. 고객마다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다. 사실 이 부분이 맞추기에는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LQA 시트와 함께 피드백이 지속적으로 올 경우 최대한 고객 성향을 파악하여 수정하고 적용하는 것이 좋다. 점수에 들어가는 부분은 아니지만 피드백에서 지향하는 대로 다양하게 번역 스타일을 적용할 수 있다면 선호하지 않을 고객은 없을 것이다.
5. Repeated
1~4번까지의 오류가 반복해서 발생했을 때 체크되는 항목이다. Repeated 항목도 점수에는 들어가지만 후에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닐 수 있다.
지금까지 번역 품질을 평가하는 항목과 오류 심각도에 따른 분류를 알아보았다. 가끔 리포트를 전달하면 별 반박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번역가분들이 있다. 결과 자체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러는 분들도 있지만 선생님한테 시험 결과를 받은 것처럼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리포트 너머에서 번역을 평가하는 것도 사람의 일이다.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오류로 잡혀있던 항목이 오류가 아니었던 경우도 있고, 불합격 판정을 받은 리포트를 반박 과정을 통해 합격으로 만든 적도 있다.
번역을 평가하는 입장에서도 결국 평가자 본인의 관점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번역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갖고 논증할 수 있다면 잘못된 평가를 받았을 때 그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다. 적어도 '형편없이 번역했다'는 오해를 받지 않을 수는 있을 거다. 이런 게 번역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단 하나의 완벽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정 이상의 수준을 충족하는 다양한 정답이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