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번역서가 몇 권 정도나 있을까? 대형 서점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면 어림잡아 30~40개 정도의 번역서가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최고의 번역이 있어서 그 한 권만 읽어도 된다면 10쇄고 100쇄고 계속해서 찍어내면 그만일 터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마다 읽기 쉽다고 생각하는 문장 스타일이 다르고, 원문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해가 지날 때마다 새로운 번역서가 나오고 기존의 번역서를 부정하는 책이 나오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출판 번역은 이렇듯 다양한 해석의 장이 열려있다지만 기술 번역 분야는 어떨까. 기술 번역 쪽도 별반 다르지 않다. 번역가 관리와 평가를 진행한 약 4년간 많은 번역가와 번역 테스트를 진행해왔다. 중간중간 테스트지를 변경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의 테스트지로 수십 명 이상의 번역가를 테스트했다. 재미있는 점은 A4지 한 장 정도 되는 길이의 번역 테스트인데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번역본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프리랜서 번역가를 선발하기 위해 번역 업체에서 진행하는 테스트는 그렇게까지 세분화된 평가 양식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어느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지 모르기 때문에 전체적인 번역 실력을 측정할 뿐이다. 하지만 실제 번역 작업을 진행하면서 고객에게 피드백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여기서 고객은 해당 서비스나 물건을 사용하는 실제 고객이 아니다. 번역 작업을 요청한 기업을 지칭한다. 각종 지침과 스타일 가이드는 최종 고객인 이 기업이 표현하고 싶어 하는 브랜드의 성향과 가치, 분위기 등을 대변하고 있다. 번역이 완료된 후에도 부족하거나 수정하고 싶은 부분은 품질 평가 항목을 통해 피드백 리포트를 보내기도 한다.
이 덕분에 기술 번역에서는 정답에 가까운 번역을 찾아내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어떻게 하면 정답을 찾아갈 수 있을지 알아가 보기로 하자.
이 글은 2부로 나눠서 작성할 것이다.
1부에서는 정답에 가까운 번역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다양한 족보에 대해 이야기하고, 2부는 번역 후 받게 되는 정답지 양식인 번역 품질 평가 항목을 살펴볼 예정이다.
이제 번역을 하면서 참고할 수 있는 다양한 족보에 대해 알아보자. 족보는 크게 보면 스타일 가이드, 고객 지침, 용어집, 기타 참고자료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번역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스타일 가이드부터 살펴보겠다.
스타일 가이드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국적 기업들은 대부분 언어 전문가를 고용하고 있다. 이 전문가들은 직접 번역을 진행하기보다 납품된 번역본의 최종 품질을 평가하고 수정하는 역할을 한다. 스타일 가이드도 대부분 이 언어 전문가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스타일 가이드를 작성하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기업이 내세우는 브랜드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고객과 어떤 관계로 소통하고 싶은지, 문화별로 지향하거나 지양해야 하는 점이 있는지 등이다.
이런 기본 틀이 갖춰지면 번역과 관련된 실질적인 내용을 구성하게 된다. 구성되는 내용은 기업마다 다양하기 때문에 공통으로 자주 볼 수 있는 내용만 몇 가지 소개하려 한다.
1. 어조(Tone)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좀 더 빠르고 직접적으로 고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기업의 메시지도 좀 더 친근하게 바뀌었다. 페이스북 같은 경우 딱딱한 어조를 지양하고 가볍지 않으면서도 친근한 어조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 앱의 고객 센터를 들어가 보면 '프로필 및 설정에 프로필 사진을 추가하고 정보를 수정하고 타임라인에서 게시물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아보세요'라고 적혀있으며 고객 센터 내 대부분의 어조가 이와 같다.
이처럼 친근하게 다가갈지, 진중하고 엄숙하게 다가갈지 기업이 표현하고자 하는 브랜드 가치에 따라 어조가 결정된다.
2. 대명사(Pronouns)
영어의 경우 You, It, They 같은 대명사를 자주 사용한다. 반면 한국어에서는 반복되는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한다. 이때 대명사를 그대로 사용할지 혹은 다른 용어로 바꾸어 사용할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행지 숙소를 검색하기 위해 웹사이트에 접속해보면 '고객님만을 위한 특별 혜택 ' 같은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 You는 고객님, 회원님, 당신, 귀하, 여러분, 사용자 등 여러가지로 번역될 수 있기에 주로 어떤 상황에 어떤 용어로 번역해야 하는지 확인하면 좋다.
3. 단위(Unit)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사용하는 길이나 무게 단위가 다르기 때문에 스타일 가이드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거의 반드시 들어간다. 파운드나 마일을 킬로그램이나 킬로미터로 바꿀 것인지, 바꾼다면 변환되는 수는 어떤 기준으로 환산할 것인지 등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4. 문법(Grammar)
문법은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를 다루고 있다. 수동태나 능동태, 조사, 약어나 두문자어의 사용, 합성어 등 원문과 번역문 간의 문법적 차이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적혀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기본적인 한국 문법에 맞춰 작성되기 때문에 한국어에 자신이 있다면 예외적인 상황만 확인해도 괜찮을 것이다.
5. 구두점(Punctuation)
번역을 하다 보면 다양한 구두점을 보게 된다. 마침표나 쉼표는 수두룩하고, 콜론(:)이나 세미 콜론(;), 하이픈(-) 등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어떤 기호를 사용하고 어떤 기호가 한국어에 맞지 않아 사용하면 안 되는지, 사용할 수 있는 기호라도 어떤 경우에 사용하거나 안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객 지침은 번역은 물론 작업의 시작과 납품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번역과 관련해서는 스타일 가이드에 미처 집어넣지 못한 부분이나 번역을 진행하면서 추가적으로 수정해야 할 부분 등에 대한 지침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2019년 1월에 작성된 스타일 가이드의 경우, 작성 당시까지는 영문 브랜드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적혀있었지만 현지화 과정에서 웹사이트 및 매뉴얼에 한글 작성 후 괄호 안에 영문 병기(한국어 브랜드(영어 브랜드))하도록 규칙이 변경되었다면 이런 수정 사항은 스타일 가이드에 바로 추가되지 않고 고객 지침으로 별도 전달된다. 스타일 가이드의 업데이트 기간은 업체마다 상이하다. 1년마다 하는 업체도 있고 2, 3년마다 하는 곳도 있다 보니 그 기간 동안은 고객 지침을 별도로 정리하여 혼선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용어집(Glossary)은 해당하는 번역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작성한 용어들의 모음이다. 용어 사전이라고도 하는데 왜 굳이 이런 용어를 모아놓는 걸까?
단 한 명이 모든 번역을 다 하면 좋겠지만 분량이 많은 프로젝트의 경우 2명 이상의 번역가가 붙어서 진행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번역가마다 선호하는 검색 사이트가 다르고 찾게 되는 용어도 다르다 보니 원하는 대로 번역하게 놔둔다면 하나의 용어를 2개 이상의 뜻으로 번역하게 된다. 당장 구글에서 아무 지역이나 호텔을 찾아서 이름을 확인해보라. 영어로 된 호텔 이름은 그나마 통일된 경우가 많지만 그 외 언어로 된 호텔의 경우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번역하거나 그냥 영어 발음대로 표기한 경우도 있고 아예 원문으로 표기한 경우도 더러 있다.
이렇게 용어가 일관성 없이 번역되면 번역의 품질을 보장할 수 없고 이를 수정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문서로 된 용어집을 보면서 하나하나 확인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번역 프로그램인 CAT 툴에서 텀베이스(Termbase)를 사용하거나 품질 관리에 사용하는 QA 툴을 사용하면 단시간 안에 용어를 확인하고 적용할 수 있다. 이 내용은 후에 CAT 툴(Computer-Assisted Translation Tool)에 대한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마지막으로 기타 참고자료도 번역 작업 시작과 함께 전달받는 경우가 있다. 참고자료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게임 번역인 경우 게임 내의 캐릭터 그림이나 관계도, 스크린샷 등이 될 수도 있고, 모바일 기기의 운영체제나 앱 번역을 하면 아예 관련 기기를 사용하거나 앱 설치 파일을 전달받기도 한다.
번역을 진행하게 되면 위에 설명한 족보 중 하나 이상의 자료를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자료를 받을지는 모르지만 고객이나 번역 업체에서 전달하는 자료는 놓치지 않고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돈도 안 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겠지만, 경험이 하나씩 쌓이다 보면 준수한 번역 솜씨를 지닌 번역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답이 보이는 문제라면 족보만 달달 외워도 높은 점수를 받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