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지속가능발전, 그리고 철학

우리 인간 이해하기 NO 1.

by Dr Jang

인간은 아마도 이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추상성을 이용하는 유일한 동물일 것이다. 유발 하리리는 통화, 국가, 종교 등의 예를 들었다. 이것의 배후에는 사피엔스 종의 인지혁명이 있다. 인지혁명으로 인해 사피엔스는 문화를 가지게 되고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

물리적 조건으로서의 생물학은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과 능력의 기본 한계를 결정하고 모든 역사는 이런 생물학적 영역의 구속 내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생물학의 범주 안에서 다양성을 추구하게 되었고 지금의 문명을 이루게 된다. 인지혁명 이후의 여러 가지 초기 노력들, 예를 들면 농업혁명, 국가의 탄생, 경제 제도의 운영 등이 이뤄지게 되고 추상적인 ‘신화’를 도입해 세상을 해석하려 한다.


영화 '타이탄의 분노'가 있다. 신들의 전쟁 중 힘에서 밀린 제우스가 아들 페르세우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이기는 내용이다. 영화가 가지는 상상력과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화려함이 긴박감을 가지지만 제우스도 하데스도 이 전투에서 사라진다. 신화가 사라지고 페르세우스라는 영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의 몰락은 인간에서 철학을 가져다 주었다. 생각하는 힘을 기른 인간은 결국은 이 지구를 좌지우지 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젠 지구 전체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존재이자 아주 추상적인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는 생명체가 되었다. 지구를 이렇게 만들고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 인간은 원래 그러한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풀려면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지속가능발전이 가능한 것이며 물론, 그 중심에는 환경이 존재한다. 앞으로 몇 개의 글로 이러한 내용을 전하려 한다.

타이탄의 분노1.PNG '타이탄의 분노' 영화 포스터. 크로노스와 페르세우스가 싸우고 있다.




1. 그리스 철학


그리스 철학은 철학의 발생으로 볼 수 있다. 신화에 의존하던 세상의 해석은 그것에 의문을 품고 설명하려던 학자들의 노력으로 철학을 탄생시켰다. 노예가 있던 시대, 그리스인들은 세상을 사유하기 시작했다.

탈레스는 각 지역의 신화가 일치하지 않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다 신을 세상 중심에 놓지 않고 만물의 중심을 ‘물’이라고 하였다. 일종의 합리적인 설명인 셈이다. 아낙시메니스는 그것을 공기라고 하였고

피타고라스는 아르케를 수라고 생각했다. 수는 세상의 질서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셈이다. 피타고라스는 일종의 종교적 의미에서 수를 다뤘으며 그래서 그런지 무리수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무리수는 쉽게 말하면 딱 나눠떨어지는 수가 아닌 수이니깐 말이다. 음악적으로도 피타고라스는 모든 음계를 수학으로 표현했으며 피타고라스 음계라고도 불려진다. 아르케를 탐구하는 자세가 더 이상 신화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엿보이기도 한다. 즉,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했는 것이다. 질서를 추구하는 경향은 이후의 플라톤에게 이어진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르케를 불의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불이라는 것이 타고 있으면서 벌어지는 오묘한 변화에 영감을 받을 듯하다. 질서(코스모스) 속에서 만물은 법칙(로고스)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르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데모크리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원자라고 하였다. 원자는 물질의 기초이고 원자가 모여 영혼이 되고 물질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일종의 유물론의 입장이다. 그리스가 민주정이 되고 선거가 이뤄지면서 말을 잘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이런 흐름을 편승한 이들이 소피스트였다. 소피스트는 상대주의를 무기로 논리적 언변을 통해 상대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 종류의 말은 사실, 진리와는 상관없고 오로지 상대에게 알맞은 전략만을 만들어 낸는 말이다. 이런 흐름을 바꿔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진 지적 우월감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인으로 알려져 델포이 신탁을 받지만 그는 사람들의 반감을 사 사형을 당한다.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바 벗어날 기회가 있지만 그는 거부한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남기고 죽었다고 하지만 의문이 남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몸이 아파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깐 말이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지 사고할 수 있는 계기도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철학자다.

환경문제 혹은 지속가능성의 문제 해결 과정에서 각 개인의 만족과 환경의 질 확보는 일면 일치하는 면도 있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개인은 개인의 이익 혹은 자신의 가치가 최대화 되길 원하지만 모든 개인의 요구 조건이 충족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울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합리적이고 적정한 수준에서 만족을 시킬 필요가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허용하면 절대적인 면(환경의 수준)의 기준이 모호해 진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개인의 입장은 무시가 될 수 있다. 환경을 위해 개인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환경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 역시도 인간이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이 느끼는 바와 환경의 질 확보를 동시에 추구할 필요가 대두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절대적인 진리와 상대주의론자들의 변론은 이러한 점에서 시사점을 가진다. 절대주의가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주의자들이 그르다는 식의 흑백논리보다 최선의 합의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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