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지속가능발전교육
거대 담론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모더니즘이 무너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야기될 때만 하더라도 '개인'이 가장 중요한 사회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거대담론이 세상을 휩쓸고 있고 미시적인 '개인'은 미디어 등에서 한낱 '기인'으로 소개될 뿐이다. 물론 '개인'에 대한 관심은 출생률 저하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은 개인이 수도권 과밀이라는 압력에 못 이겨 내놓은 대책으로 볼 수 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개인은 단지 숫자와 점에 불과했다.
매일 숫자로 표현되는 감염자와 사망자, 지도에 도형으로 표현되는 감염자 및 이동경로가 개인의 전부였다.
안타까운 사람들의 죽음은 저마다 모두 사연이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파도에 묻혀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 코로나가 끝났다.
기후위기가 현실이 되었다.
모든 일상적이지 않은 일에 대해 '기후위기'라는 말은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것 같은 마법의 단어가 되었다.
기후위기가 눈앞에 나타나니 모두들 해결을 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특히 교육에서는 생태전환교육, 탄소중립교육, 생태교육, 환경교육 등등, 수많은 교육들이 나타나 저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고 지식을 늘리며 참여하는 시민을 길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가장 중요한 전제인 '사람'이 빠져있다.
아무리 훌륭하게 코로나를 극복했어도 코로나에 희생된 사람들에겐 '극복'이라는 단어가 맞지 않다.
사랑하는 가족이, 친구가 코로나에 희생이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비극인 것이다.
기후위기도 그렇다.
어쩔 수 없이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기후위기 극복은 거대담론이 되어 개인을 휩쓸고 다닌다. 물론 기후 조건이 바뀌면 현재의 삶도 위태로울 수 있다. 그렇다고 연약한 개인들의 삶이 거대담론에 희생되어야 하는 것에 정당성이 부여되지 않는다.
기후위기도 개인의 삶도 동일하게 중요하게 여기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개인의 희생이 당연시되면 안 된다.
결국, '나'자신의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대 담론에 매몰되면 이 당연한 명제도 간혹 잊어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