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 멋진 영웅은 없다.
대초에 인간은 신 다음이었다.
신의 모습을 본 딴 인간의 모습은 겉모습은 신과 같았다.
인간의 교만함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운명으로 이어졌으며 그 후 인간의 삶은 구질구질해졌다.
달리 말하자면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우리가 찬란한 문명이라 말한 여러 문명들은 사실 먹고살만한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만들어졌고 최근에 와서는 물질의 양, 즉 농사, 기후, 물자의 이동 등으로 문명이 왜 흥했는지 밝혀졌다.
예를 들면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에 따른 기름진 땅에 일궈진 농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농사가 잘 되니 관념적인 생각이 출몰했고 인간들은 이 세상의 근원인 신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신은 태양이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자연조건에 대해 인간은 경외심을 가지고 살았다. 말이 경외심이지 사실 납작 엎드려 빌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그래서, 늘 멸종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우리가 경외시 하는 자연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때, 그러니까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던 근대에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놀라운 성취 덕분에 잠시 신과 동등한 위치에 인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인간과 여타 생물이 다르지 않고 심지어 거의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 인간이 일으킨 기후위기는 인간이 가진 교만함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간의 위치는 더욱더 추락하고 있다. 생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면 생물들도 나름의 삶이 있다는 것에 동의하며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논의는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는 한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첫 번째로는 자연의 무인격성이다. 말 그대로다. 자연은 인격이 없다. 자연은 신이 아니다. '자연=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자연이 더 큰 존재다. 자연은 인간의 이해를 구할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냥 규칙을 가지고 존재할 뿐이다.
두 번째로는 생물은 인간의 이해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이 각종 생물을 보호하자는 각종 구호는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며 이런 구호를 외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멸종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자연도 생물들도 사실 인간에 대해 관심이 없다. 인간은 벌처럼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도 원래 아니며 그냥 존재해서 살아온 생물이다. 지구의 위기라고 떠드는 것도 사실 인간의 삶이 위협받기에 나타나는 반응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으면 그것은 때로는 구질 구질하게 목숨을 이어왔다. 기후 때문에 굶어 죽을 뻔했으면서도 과학 기술 발달 때문에 에너지를 펑펑 쓰면서 살고 있다. 그 시대의 인간은 그냥 살고 있으면 죽기 싫어한다.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게 구질구질해도 말이다. 인류 앞에 놓은 기후위기의 멋진 해결은 인간들의 관념 속에 존재한다. 이것조차도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다.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으며 구질구질하지만 아름다운 생을 위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마치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