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 이해되기
약간은 이슈화가 되는 영화다 보니 보는 것이 망설여졌다. 괜히 남녀라는 쓸데없는 갈등의 물결에 휩싸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집사람의 제안에 보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냥 영화일 뿐이었다. 좀 더 설명하자면 감동을 주기 위해 허구적 사실에 토대를 둔 예술작품이라는 이야기다. 뉴스에서 보면 별점 테러를 한다거나 페미니즘 영화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내용을 두고 상당히 극단적으로 몰아간 것 같았다.
김지영이라는 사람이 있다. 남녀의 구분은 사실 무의미하다. 인간이란 항상 뇌구조가 그런지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태초에 남녀라고 구분을 지었을 것이다. 구분을 지어 놓고 저쪽이 이렇고 이쪽은 저렇고 말이 많지만 그건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자연이 그렇게 하라고 한 적은 아마도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아온 여러 종류의 ‘김지영’이라는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주인공을 기준으로 할머니, 어머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회구조가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시절 여성이 대놓고 차별받던 시절을 먼저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는 당연히 가슴에 한이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 지점을 먼저 건드린다. 아픈 곳을 건드리니 슬프고 눈물이 난다. 관객들의 가슴이 먹먹해지는 지점이다.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어린 자녀를 둔 평범한 엄마의 이야기도 공감을 자아낸다. 공감이 가고 화가 나고 슬프다.
인간을 왜 그렇게 남에게 상처를 줄까? 생각해 보면 김지영의 아버지도 그렇다. 습관적으로 배워온 대로 딸을 대하고 상처를 준다. 여자는 이러이러하다는 그 시대의 산물을 충실히 습득한 결과이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그도 피해자다. 시대가 말하는 바를 맹목적으로 흡수한 결과, 자식의 소중함을 놓친 부분이 많다. 사회가 정해 놓은 바를 충실히 따라 하다 보니 가족의 아픔과 어려움을 짐작하지 못하고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가 깨달았을 때는 수많은 시간이 지난 후다.
이런 점은 김지영의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같은 여성이긴 하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도 피해자인 것이다. 주변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잘못된 신념 때문에 놓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영화를 본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봤다. 특히 여성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생을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 더 혹독하다는 것이다. 나와 같이 사는 이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결국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행복이 무엇인지 몰라도 불행은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긴 세월을 보자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러기에 힘들다. 그렇게 힘든 데 굳이 누구누구를 구분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은 저마다 사회에서 배운 것과 스스로 경험한 것을 토대로 판단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잘 모르는 것은 구분하여 대상화, 일반화한다. 이 영화도 그러하다. 구분하여 특징을 짓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되면 개인이 보이지 않는다. 개인을 기준으로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해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쉽진 않다. 나와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분하여 일반화, 대상화하는 것은 더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그냥 인간 김지영으로 기억하자. 누구나 그렇다. 그냥 인간 000으로 이해될 때 인간 000 이는 더 큰 생명력을 얻는다. 불행할 일이 많은 인생에서 그나마 행복해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