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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Dec 03. 2016

#08.마음은 효(孝)스러운데 물질이 죄(罪)스럽다면?

孝에 기댈 수 없는 시대

1960대 초만 해도 가구당 평균 출산 인원은 여섯 명에 달했다. 저녁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면 흐릿한 가로등 밑에서 다방구, 술래잡기, 숨바꼭질 등을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넘쳐나던 터라 엄마를 대신해서 언니 오빠, 누나들이 더 어린 동생을 데리고 나와 함께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한 교실에 60~7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했던 콩나물 교실,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눈 것이 그 정도다. 가정교도 대 집단을 형성하면서 살아야 했기에 형제간의 우애와 협동심, 연장자에 대한 예절의식,등 삶의 중요 덕목들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다.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들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우리의 부모들은 그 많은 자식들을 어떻게 공부시킬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우리의 부모는 모두가 슈퍼맨이었다


지금은 한 가정에 한 명의 아이만 낳는 시대다. 불과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넘쳐나던 아이들은 어디가고 중년들이 넘쳐나는 나라가 된것이다.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끊어지고 있다.

지난 10년간 80조원을 쏱아부으며 을 독려지만 출산율은 꿈쩍도 않는다. 취업이 어렵다 보니 결혼은 뒷전이고 설사 결혼을 해도 아이들을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신혼부부가 늘고있다. 그나마 출산에 임하는 가정도 기껏 낳아야 한 명, 조금 과하다 싶으면 두 명이다.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아들, 외동딸이다.


성장 과정에서 형제간에 함께 웃고 울면서 서로 부딪치며 성장해야 하는 일상은 간데없고 부모들의 떠 받듦이 익숙한 왕자와 공주키워지는 집들뿐이다. 그래서일까. 버릇이 없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 자기중심적이다. 배려심이 부족하다, 고집이 세다, 등의 평가로부자유롭지 못하다.


자식이라면 꾸뻑하는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한 술 더 뜬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는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를 자처다.

내 새끼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경제적인 여력을 뛰어넘는 과도한 사교육도 마다하지 않는다. 기러기 아빠를 자처하는 가장의 외로움은 사회적인 문제를 심심치 않게 야기시킨다. 자녀 교육대한 남다른 사랑은 도를 넘긴 지 오래다. 과도하게 투입된 비용은 정작 자신들의 노후를 위한 준비를 망치고 말았다.


가구당 출생률 한 명의 시대!

형제라도 많으면 부모님을 부양하는 데 있어서 십시일반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겠지만 외동아들 외동딸은 부모를 부양하는 과정이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자식을 많이 나은 부모와 지식이 하나뿐인 부모의 노후는 다르다’

어차피 부모는 늙으면 일 할 수 없고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부모의 노년 생활 기간도 길어진 것이다.  더불어 생활비 지출 기간도 늘어난다. 비용에 대한 누군가의 부담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부모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자녀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친부 친모 장인 장모까지 총 4명의 어른들이 모두 건강하고 스스로 노후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 반대라면 하나뿐인 자녀 부부의 부모 비용 부담은 상상 이상일 수 있다. 나누어 분담할 형제가 없는 탓이다.

내리사랑이라  하지 않는가. 출가한 자식들도 자녀를 두었을  그들의 뒷바라지가 우선이다. 자기 가정 돌보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양가 부모까지 챙긴다는 것이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마음은 있겠지만 현실적 삶은 마음으로만 내 몰아 갈 공산이 크다. 효는 마음 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을 가졌다. 합당한 경제적 뒷받침이 이루어질 때 효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마음은 효(孝)스러운데 물질이 죄(罪)스럽다면 부모의 마음도 자녀의 마음도 편할 수 없다’

물질은 혈연, 학연, 지연도 끊어 내는 극단적 힘이 있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아마도 자녀가 가진 재산을 다 털어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잘되기만 바라는 우리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양육비용를 청구하지도 않는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이 들어 힘 빠지고 병들어 괴로울 때가 되면 마음 한 구석, 자녀들의 부양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이대로 늙어버리면 자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기나 긴 노후를 버텨 낼 수 있?


혹시라도 자녀의 효를 기대한다면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돈독한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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