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아내

by 이종범

빈티지(Vintage)

본래 와인에서 나온 말이다. 포도 농사가 잘 된 해에, 양질의 포도로, 정평이 난 양조장에서 만들어, 품격 높은 와인에 붙여주는 라벨을 뜻한다. 그런데 자동차, 패션, 인테리어 등의 분야로 영역을 넓히면서, ‘Oldies but Goodies(오래되어도 가치 있는 것)을 뜻하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출처 : 픽사 베이

잠실역 지하상가(8호선 환승 입구)에 가면 빈티지 매장이 있다. 계절에 맞게 일본과 유럽의 유수한 브랜드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데 자주 들르는 곳이다. 유럽인 체형의 옷은 커서 잘 맞지 않지만 체형이 비슷한 일본산 빈티지는 대부분 잘 맞는 편이다.

고심 끝에 <LINEN BLEND> Regular fit 검은색 재킷을 하나 집었다. 잘 맞았다. 옷감에 <마>의 함유량이 많아서 혹시라도 구겨지면 잘 펴지지 않을까 고심했지만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구매를 결정했다.

세탁을 마치고 처음 입은 옷의 착용 감은 더없이 좋았다. 그렇게 몇 날을 입었지만 구매 당시 우려했던 구겨짐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만큼 심한 구겨짐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래서 빈티지일까?


세월이 지나면 무엇이든 구식이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다. Pony자동차는 1975년부터 1990년까지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후륜 구동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 소형 자동차로 대한민국 자동차 공업의 자립을 선언한 최초의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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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자동차를 구경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다. 하지만 이 자동차 중 몇 대는 아직도 굴러다닌다. 만약 당신이 이 차의 주인이라면 선뜻 판매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높은 가치를 쳐 주지 않는다면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이 차의 용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즐비할 것이다. 가령 70~80년대를 표현해야 하는 영화의 한 장면에 등장할 수도 있다. 대여 비용이 푼 돈으로 가능할까? 천만에...


세월의 흔적이 가치로 인정되면 빈티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패션, 자동차, 인테리어에만 국한된다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빈티지 인생도 가능할 것이다. 나이 들수록 중후함을 자아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외모가 중후함의 멋을 결정짓는 절대적 잣대는 아니다. 격에 맞는 행동에 멋진 외모가 더해질 때 중후함의 극치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박한 멋도 그에 못지않은 격을 자아낸다. 대중성에 기대지 않아도 특정한 소수가 인정하는 빈티지 인생도 존재한다.

"제 아내와 저는 서로에게 자유를 주고 서로의 발전을 지지해줍니다. 각자의 삶을 인정해주고 그 삶을 누릴 자유를 인정해 주는 거죠. 이렇게 하면 서로 구속되거나 얽매일 이유 없이 삶을 조화롭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을 그 어느 때 보다 가깝게 이어주는 것 같습니다" - 핫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중에서 -


100년 인생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천수를 다 한다면 70년을 함께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면서 70년을 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남편, 그런 남편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삶이라면, 이 보다 더한 명품 인생이 있을까?


살다 보면 그땐 몰랐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발견되는 특별한 가치도 있다. 삶에서 발견한 인생 빈티지가 그것이다. 묵을수록 그 가치를 더하는 장 맛처럼, 배우자를 대하는 과정에서 그땐 몰랐는데 함께 나이 드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긍정 요소가 있다면 들춰내어 가치를 입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가운데 기쁨과 행복이 존재한다. 이는 부부간 친밀감에 기인한다. 그러자면 서로의 삶에서 소소한 가치를 발견하는 관심의 눈이 필요하다.


“아내의 손 맛”, “큰 일도 쉽게 처리하는 능력”, “조카들에게 큰 용돈을 주는 넉넉한 마음”은 빈티지 급이다. 속 좁은 남편이라 그런지 용돈 부분은 오해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있어야 준다고 보면 당연히 잘 못된 행동이지, 하지만 마음으로 주는 거야. 세상에 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아까워, 하지만 마음이 우선인 것 같아. 늘 그럴 순 없지,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가족 대 소사가 있을 때나 보는데, 용돈 조금 더 준다고 우리가 힘든 건 아니잖아. 당신은 이 집안에 맏아들이잖아”


그렇게 말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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