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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Apr 01. 2020

#15. 작은 체구, 느린 걸음, 0.1%의 주인공

알을 낳아 다음 세대를 잇는 생명체는 많다.

병아리도 그중 하나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보면 조그만 부리를 이용하여 알 안쪽 내벽을 쪼기 시작한다(啐_부를 줄). 이는 새끼 병아리가 알을 벗어나기 위한 몸짓이기도 하지만, 알 밖에 있는 어미 닭을 부르는 일종의 신호이기도 하다. 이 소리를 들은 어미 닭은 새끼가 무사히 알 밖으로 나올 수 있게 같이 쪼아 준다(啄_쫄탁) 안과 밖에서 힘을 합친다는 의미로 많이 비유되는 고사 성어, 줄탁동시(啐啄同時)다.


배철현 교수의 <심연>을 읽었다. 제3부에 수록된 <임시치아>에 거북이에 관한 글이 있다.


1. 어미 거북이의 회귀(본능)

알을 낳기 위한 어미 거북이의 수 천 km 바다 횡단은 사투의 연속이다. 파고가 제일 높은 날, 가장 뜨거운 날, 거칠고 높은 파도를 가르며 자신이 태어난 해변에 도착한 어미 거북이. 아무도 없는 한밤중을 택해 바닷물이 닿지 않는 모래사장 후미진 곳을 찾는다. 그리고 30㎝ 가량 구덩이를 만든 다음 50~200개의 알을 낳는다. 맹금류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 모래를 덮는다. 그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2. 아기 거북이의 세상 맞이(출생)

2개월 후, 아기 거북이는 알 속에서 생존을 위한 무기를 만든다. ‘카벙클(carbuncle)’이라는 임시치아(臨時齒牙)다. 이 치아를 사용해 알을 깨고 나온 아기 거북이는 비로소 생존을 위한 사투 라인에 선다. 어미 거북이가 덮어놓은 30㎝ 두께의 모래를 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힘도 없는 갸녀린 몸으로 3일에서 7일 동안 모래흙을 뚫고 지상에 올라오면 몸무게도 30%나 줄어든다. 말 그대로 사투를 벌인 셈이다.


3. 아기 거북이의 바다를 향한 질주(도전)

그렇게 30cm의 두께 모래를 뚫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과정이 생존을 위한 1차 전쟁이라면, 더 무시 무시한 2차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모래 위엔 포식자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바다 갈매기, 독수리, 그리고 사람이 그들이다. 아기 거북이는 이들 포식자의 눈을 피해 한 밤중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질흙 같은 밤이 오면 바다를 향한 운명의 질주를 시작한다. 자신이 살아갈 바다로 말이다.


4. 아기 거북이의 1년_생존을 위한 버팀의 시간(인내)

아기 거북이는 입수 후 바다의 가장 밑바닥 심연(深淵)으로 향한다. 자신들을 위협하는 큰 물고기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심연에서 아기 거북이의 인생을 시작한다. 바다거북이의 첫 1년간 바다 생활을 관찰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시간은 ‘실종의 기간’이다. 1년을 홀로 살아남아야 비로소 ‘거북이가’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


5. 자신이 태어난 해변으로의 회귀(원점)

무사히 성장하여 20년이 지나면 짝짓기를 한다. 그리고 어미 거북이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천 km 바다 횡단을 시작한다. 그리고 어미가 그랬던 것처럼 알을 낳는다. 그렇게 대를 이어 태어난 아기 거북이가 다시 돌아와 새끼를 낳을 확률은 0.1%. 그러게 많은 알로 태어났지만 다음 세대를 이을 수 있는 자격은 천 마리 거북이 중에서 단 한 마리 거북이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셈이다.


병아리와 다르게 혼자만의 힘으로 알을 깨야 하는 아기 거북이의 삶은 병아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겹다. 알을 깰 때도,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어미 거북이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1% 생존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어린 거북이의 삶의 여정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

작은 체구와 느린 걸음처럼 원치 않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함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바다로 향하는 거북이의 인내와 끈기를 배우자. 그것이 토끼와의 경쟁에서 이긴 거북이의 승리 공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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