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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Aug 23. 2020

억지로 꾸민 나를 나다운 사람으로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침부터 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가 되면서 장대비가 쏟아진다. 요 며칠 맑고 더운 날씨가 지속되면서 본격적인 무더워가 시작되나 싶었는데,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래서일까,  마치 리허설이라도 하듯 천둥번개를 동반한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오후다.


테라스에 내다 놓은 화초들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를 반기는 듯, 유난히 초록 빛깔이 선명해 보인다. 고무나무,  치자, 꽃기린, 노랑과 빨강이 한 몸처럼 섞여 핀 분꽃,  하얀 밑동을 가진 붉은빛 나팔꽃,   무엇하나 빠짐없이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마주하며 버티고 있다. 그런가 하면 후 드러지 게 핀 난 줄기엔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단풍나무 줄기를 타고 오른 호박잎도. 비바람과 태풍에 적지 않은 어린 감을 잃은 우리 집 감나무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오후다. 그러고 보면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엔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없다는 말이 새삼 와 닿는 오후다.

치자와 고무나무
단풍나무를 타고 오른 호박 잎
꽃기린,  볘고니아,  능소화
감나무와 나팔꽃 /  이상 장대비가 쏟아진 다음날 아침 사진

법정스님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피면 된다"


'진달래답게',  민들레답게'
모든 사물은 이 땅에 때어 난 본연의 삶을 살면 된다는 뜻이다.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진달래는 진달래로,  민들레는 민들레로 사는 것이 가장 자기 다운 삶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자기만의 고유함을 잃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본질적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비교'의 굴레를 벗겨내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가장 나답게 살기 위해서라도 비교를 차단해야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너무 쉽게 '비교의 잣대'를 받아들인다. 그렇다 보니 억지로 꾸민 나를 나다운 사람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잘 되고 싶은 나를 동경하며,  있어 보이는 곳을 기웃거리는 나, 본질적인 나를 감추고 더 나은 무엇 위에 숟가락 하나를 슬쩍 얹어놓고 마치 그것이 나다운 삶이라고 억지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한자에 '비교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比(견줄 비)가 있다. 이 글자는 匕(비 수비)와 匕(비 수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사람(人)이 뒤집힌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는 사람이 죽어서 엎어져 있는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문자로 쓰인다. 그렇다면 두 사람(匕, 匕)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견줄 비(比)는,  두 사람이 무언가 겨루기 위해 출발선에 서 있는 꼴이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비수는 칼이다. 칼은 사물을 변형시키는 도구지만 죽음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칼(비수)은 요리사에겐 조리 도구지만,  전장의 군사들에겐 적을 죽이는 무기로 둔갑한다. 그러므로 견줄 비(比)는 서로 상처를 주는 무기로 둔갑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비교(比較)하면 불행해지는 이유다.


비교하지 않는 삶이란 자기 본연의 삶에 충실한 것이다. 자기 본연의 삶이란 가장 자기 다운 삶을 뜻한다. 그렇다면 가장 자기 다운 삶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나답다'는 말은 어떤 모습을 이르는 것일까?


내 안에 존재하는 나는 내성적이다. 직접 총대를 메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분히 정적이고 개인적 성향이 강해서 혼밥,  혼술도 이상하지 않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매사에 뒤로 빼거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은 아니다. 본업이 강사인 만큼 대중 앞에 서서 특정주제로 강의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고교 1학년 때 8명의 남성중창단을 만들고 이후  41년간 수많은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YB, OB 합창단 정기연주회를 지휘했다. 그렇지만 노래방에 가면 한곡도 부르지 않는 게 나다. 노래를 못하거나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음악적 편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은 간접 소통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글쓰기다. 4~5년 전만 해도 페이스북에 덧글을 쓰는 것도 넘사벽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브런치 작가를 도전하면서 넘사벽처럼 느끼던 나의 모습이 하나, 둘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엔 지휘하는 나를 보면 행복했다. 하지만 글쓰기에 빠지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 안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때. 그리고 그것을 강의할 때 가장 행복하다. 내 안에 숨은  열정이 폭발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루 종일 한자리에서 글을 써도 힘들지 않다. 매일 한 편씩 글을 쓸 때도 힘들기는커녕 재미있고, 살아서 꿈틀대는 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런 면에서 브런치는 지난 50여 년간 잊고 살았던 내 안의 나를 발견시킨 고마운 공간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나, 강단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동기를 자극하는 나, 아마도 그런 내가 가장 나다운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함께 보다는 홀로, 말하기보다는 듣기, 판이 벌어지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나도, 나다운 나의 또 다른 단면인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가장 나다운 나는,  나를 거부하지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가장 자유롭고, 어색하지 않은 시간, 그것이 바로 '나다운 나'와 마주한 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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