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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Aug 16. 2021

은퇴 농사는 농부의 마음으로 지어야...

자연의 이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고, 과정이 튼실해야 결과도 좋아지니까요? 농민 작가 전우익 선생이 지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의 글은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저자의 깊은 성찰이 잘 드러나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전우익 지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풀을 뽑는 일이기도 합니다. 곡식은 뿌려야 나지만 풀은 옛날부터 지난해까지 떨어진 풀 씨가 수 없이 돋아납니다. 부정적인 역사의 유물과 유습들이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 듯 잡초는 수 없이 돋아납니다. 그걸 뽑아주지 않으면 곡식이 오그라지고 시들어 녹아버립니다. 부정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끈질기고 뿌리가 억센가를 말해 주는 듯합니다”


농사는 씨를 뿌리고 결실을 맺기까지 수많은 변수들과 싸워야 하는 수고가 뒤따르듯, 식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릴 들으면서 큰다는 말이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을 풀을 뽑는 일이다”


농부의 목표는 풍년입니다. 풍년으로 가는 길엔 수없이 많은 걸림돌이 존재하죠. 가뭄, 태풍, 그리고 잡초 같은... 가뭄과 태풍은 농부가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만큼 농부의 수고가 따르지 않으면 물이 없어서, 또는 물이 너무 많아서 곡식을 죽이게 되니까요.


가뭄을 이기려면 농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논과 밭에 물을 대야 합니다. 그런 수고를 포기하면 곡식은 말라죽고 말죠. 반면에 태풍은 일시에 많은 비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태풍이 지나간 다음 빠른 속도로 논과 밭에 들어찬 물을 적절히 제거하고 쓰러진 곡식을 세우고, 각종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약을 치는 것 외엔 달리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가뭄과 태풍은 농부의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지만 잡초는 농부의 부지런함을 시험합니다.


“곡식은 뿌려야 나지만 풀은 옛날부터 지난해까지 떨어진 풀 씨가 수 없이 돋아난다”


풀 씨는 농부가 원하지 않는 잡초를 말합니다. 잡초도 생명체인 만큼 양분이 공급되어야 생명을 유지할 텐데, 수많은 잡초들에게  양분을 빼앗기 곡식은 온전히 자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잡초의 씨앗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거죠.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씨앗들이 매년 농부의 수고를 요구하까요. 그러고 보면 잡초는 풍성한 결실로 가는 하늘의 시험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뽑아주지 않으면 곡식이 오그라지고 시들어 녹아버립니다”


농사를 훼방 놓는 걸림돌(잡초)을 제거하지 않으면 농사를 망친다는 이야기겠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뭄이나, 태풍은 농부가 해결할 수 있는 걸림돌이 아니지만 잡초는 농사를 망치지 않을 만큼 제거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손이 부족해서, 너무 더워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잡초를 내버려 두면 농부가 원하는 결실은 희망사항으로 그치고 맙니다


과거의 어느 날부터 지금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은 농부들이 손으로 뽑고, 약을 쳐서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잡초는 사라지지 않고 나타납니다 그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풀이 잡초죠.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면 피해를 최소화하는 차원의 관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농부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일일 겁니다.


그렇다면 은퇴 농사는 다를까요?


"은퇴 농사를 망치는 가장 위험한 잡초(걸림돌)는 '자기 합리화'입니"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은퇴준비를 합니까”

“빚부터 해결해야, 은퇴준비를 하죠”

“설마 굶겠어요, 어떻게 되겠죠”


은퇴자들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늘 되묻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그렇기 때문에 은퇴 후 삶이 망쳐도 된다는 뜻인가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다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은퇴준비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은퇴 후 40년을 망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까요? 정상적 사고를 하고 있다면 은퇴 후 40년을 망쳐도 된다고 답할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은퇴 농사를 실패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 가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은퇴가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은퇴가 이런 것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살진 않았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퇴 준비를 호소하고, 부탁하고, 권유하고, 제안하고 때로는 협박까지 했는데, 은퇴준비를 하지 않는(아니,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물론 제 생각이 편향적일 순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은퇴 준비를 할 수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한 줄기 희망의 통로를 막아버렸기 때문 아닐까요?


1. ~때문에(탓) 은퇴 준비를 할 수 없었다.


‘환경이 좋지 않아서’, ‘빚이 많아서’, ‘못 배워서’, ‘먹고살기 바빠서’, ‘사업에 실패하지만 않았어도’…


그것이 무엇이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유들입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은퇴 준비가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퇴 준비를 가로막는 사유들이 나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은퇴 준비를 가로막는 버거움이 나에게만 국한된 것일까요?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준비를 했다. 그런데~


‘나는 연금성 자산으로 300만 원이 넘으니까 안심이다’. ‘임대소득으로 200만 원 이상 나오고 국민연금, 퇴직 연금을 합하면 500만 원은 된다’. 저축 자산 3억, 아파트 한 채, 그리고 연금 소득까지 있으니까 은퇴 걱정 없다...


 일반적 시각으로 보면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퇴 농사는 보이는 겉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론 마지노선을 넘은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리스크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가령 자녀 리스크가 남아 있다든가, 보증을 서거나, 준비되지 않은 창업을 하는 것도 은퇴 농사를 한방에 망칠만한 파괴력이 있어서죠


"은퇴 농사는 끝나야(死) 끝이 납니다.


농민 작가 전우익 선생이 앞선 글에서 지적한 “풀 씨’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풀 씨는 해마다 농부의 수고를 요구하는 잡초를 만들어냅니다은퇴준비를 할 수 없었다는 '부정적 자기 합리화’도 문제지만, 그렇기 때문에 은퇴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낙관적 자기 합리화'도 문제입니다. 은퇴 후 40년입니다. 설령 준비가 되었어도 '자녀 리스크', '창업', '보증, 보이스피싱' '금융사기''같은 것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은퇴자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농부에게 잡초가 끊임없이 제거해야 할 숙적이라면, 은퇴 농사는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인생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잡초처럼 농사를 가로막는 요인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농사의 승패가 갈리고 맙니다. 마른 수건도 짜면 물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후 자금을 조금이라도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저런 탓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면 할수록 망친 노후로 가는 수렁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잊지 맙시다. 하늘이 무너뜨려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처럼, 한 번뿐인 나의 노후를 위해  지금 이 순간 어떤 생각을 붙잡고 승부할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시작이 반이란 말을 믿는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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