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범 Apr 01. 2022

황혼 이혼의 그림자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 교수는 그의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에 이렇게 적었다.


"돈이 없다면? 돈이 떨어진다면? 그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여행은 안 가도 그만이다. 자동차도 버릴 수 있다. 돈이 없다고 대우해 주지 않은 곳은 안 가면 그만이다. 노후를 앞둔 사람들에게는 돈 보다 이런 각오가 더 중요하다. 인간 수명 100세다. 준비할 것도 많지만 이런 마음 가짐도 저축해 두면 더 든든하지 않겠는가?"  


저축(貯蓄)은 “쌓아서 모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마음 저축도 가능한 일이다. 다만 금융 저축처럼 수치로 환산할 수 없기 때문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뿐이다. 특히 마음 저축은 수련하는 마음으로 쌓지 않으면 가벼운 충격에도 무너지기 때문에, 꼭 필요할 땐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릴 수도 있다.


"당신이 나가면 그때부터 내가 숨을 쉬어요"


부부 싸움이 잦은 노 부부 이야기다.  남편은 경비 일을 하는데, 근무가 없는 날이면 아내를 피곤하게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진국 소릴 들을 만큼 평판이 좋지만, 태생적으로 깔끔하고 세심한 탓에 집에서는 아내와의 소소한 충돌이 많은 편이다. 밥상을 받으면 짜다, 싱겁다, 음식 투정은 기본이고, 노 부부가 함께 외출하는 날이면 모든 길을 다 아는 사람처럼 입이 쉬 질 않는다. 어쩌다 남편 생각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하면 윽박지르듯 소리가 커진다. 그때마다 아내는 꾹꾹 눌러 두었던 화를 표출하는 일이 벌어진다.


부부는 가장 가깝지만 틈이 벌어지면 가장 먼 사이가 되고 만다. 서로의 기대를 강제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일이 번번하게 벌어진다. 그때마다 배우자의 마음엔 ‘화’가 쌓이기 시작하고 언젠가는 사단을 만든다.


중년 부부들의 이혼도 ‘화’가 쌓인 결과물이라고 말하면 억지일까? 

아내 연령기준으로 50세 이상 이혼율을 보면 총 이혼자 대비 2019년 31.5% 2020년 34.5% 2021년 37.6%로 전체 이혼자 3명 중 1명은 50세 이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60세~70세에 이르는 10년 동안 연도별 증가 추이를 보면 50세~60세에 이르는 구간에 비해 두드러진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혼 사유 순위를 살펴보면 성격차이가 압도적으로 높다. 다만 3위와 4위에 해당하는 가족 간 불화와 배우자의 외도는 미세하게 엇갈리고 있다. 

성격 차이는 복합적인 문제다. 하지만 그 이면을 파헤치면 ‘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혼 사유 2위에 해당하는 경제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3위와 4위에 해당하는 가족 간 불화와 배우자의 외도는, 성격 차이에서 파생된 문제일 확률이 매우 높다. 성격 차이는 결국 상대방의 화를 자극하고 만다. 치유가 동반되지 못한 화는 이혼으로 끝나거나, 그게 아니면 화병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래서일까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 교수는 ‘화병’을 이렇게 정의했다


“화병은 한국인의 심암(心癌)으로, 마음속에 기생하는 악성 종양이다”


화병은 마음속 분노와 울분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으로 통증, 피로, 불면증 등 다양한 병증을 수반한다. 성경 잠언서 6: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화병(火病)의 불(火)은 번지면서 태우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마치 암세포가 전이되면서 그 세를 확장하는 것처럼, 마음의 불도 한 번 타기 시작하면 쉽게 꺼지는 법이 없다. ‘화’는 마음속에 쌓아둔 잠재적 불씨다. 그러므로 언제든 타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불씨의 크기를 가늠하는 바람의 성격이다. 단순한 강풍인지, 비바람이 혼재된 강풍인지 말이다.


여자는 혼자 살아도 남자는 혼자 못 산다는 말이 있다. 여자는 남편이 아니어도 대화할 상대가 많지만 남편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은퇴한 남편들을 관찰해 보면, 마치 길을 잃고 허둥대는 어린아이처럼, 어른 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예가 적지 않다. 은퇴 전에는 말할 사람, 들어줄 사람, 대접해 주는 사람들이 많지만, 은퇴 후엔 언제 그랬냐는 듯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늦깎이 <화>가 쌓인 탓일까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화를 토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얼마 전 퇴근길 지하철에서 어떤 어르신이 통화를 하는데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그것도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상대방을 꾸짖는다. 이를 보다 못한 아주머니 한 분이 조용히 통화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어르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통화를 이어간다. 급기야 함께 탑승한 사람들의 질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옮겨 가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이 들수록 나를 믿고 따라 줄 사람은 배우자뿐이다. 돈 버는 일도 그렇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은퇴 전과 후의 배우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특히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를 열 받게 하는 일은 절대 피해야 할 것 같다. 남편과 가족을 위해 참고 또 참았던 응축된 화(火)가 터지면 위험해지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직 후, 시장에 내다 팔 만한 당신의 인적 자산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