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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영화음악들

영화음악 추천

by kolumnlist

난 어렸을 때부터 경음악을 좋아했었어. 가사보다는 화성과 전체적인 분위기에 더 끌렸었지. 아마 팝송을 일찍부터 접해서일지도 몰라. 팝송의 가사를 일일이 찾아보면서 듣지 않았던, 어찌 보면 좀 게으른 학생이었거든. 경음악 하면 클래식이나 재즈를 많이 찾지만, 난 특이하게도 영화음악에 끌리더라고. 장면 중심의 음악이라 멜로디보다는 분위기에 더 중점을 둬서였나 봐. 장면 중심의 음악은 상상력을 더 자극하잖아. 그래서 준비했다! 내가 사랑하는 국내 영화음악들!

영화 장면은 설명에 넣지 않을게. 스포가 될 수도 있으니까…….


1. 이병우

이병우는 내가 전에도 소개했다시피 그룹 ‘어떤 날’의 멤버이자 영화음악 감독이야. 일본에 히사이시 조가 있고 영미엔 한스 짐머가 있다면 한국엔 이병우가 있지. 내가 좋아하는 그의 곡 4개만 소개할게.

1-1. 왕의 남자 – 눈먼 장생

구슬픈 피리 소리와 그 소리를 받쳐주는 스트링 사운드. 왕의 남자를 보지 않았더라도, [눈먼 장생]을 들으면 가슴이 되게 먹먹해질 거야. 가끔 음악을 들을 때 가슴이 아린 경험을 하는데, 눈먼 장생을 들을 때 그래. 가슴이 아리고 슬퍼져. 마치 추억의 장소에 잊지 못할 무언가를 두고 떠나는 느낌이야. 기억이든 물건이든. 잊지 못할 어떤 것을 두고 떠날 땐, 형체를 두고 떠나는 게 아니라 형체에 깃든 마음을 두고 떠나잖아. 그런 느낌이어서인지, 가슴 한편을 떼어 놓는 기분이야. 그래서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나 봐.

1-2. 연애의 목적 – 햇살 가득한 교정

이병우는 기타리스트야. 그래서인지 그가 담당한 OST엔 클래식 기타가 메인이 되거나, 클래식 기타 버전을 따로 만들어놓기도 하지. [햇살 가득한 교정]은 [눈먼 장생]과는 다르게 밝고 유쾌한 음악이야. 포슬포슬한 구름 위를 말캉말캉하게 걷는 기분이 들지. 첫 연애를 할 때의 그 설렘 같달까? 햇살이 포근하게 덮은 길 위를 걸으며 괜히 뒷짐 진 채로 땅만 보고 걷는 느낌. 걸음도 일자로 걷는 게 아니라, 다리로 원을 그리면서 걷잖아. 하늘도 봤다가 땅도 봤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홱 고개를 돌리는.

근데 있지, 영화는 이런 풋풋한 설렘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뭐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실, 나도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어. [햇살 가득한 교정]을 들으니까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어 지네. 이번 주말에 날 잡고 봐야겠다.

1-3. 장화홍련 –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이 노래는 너무 유명하지. 공포영화에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이 잘 맞을까? 싶다가도, 영화를 본 사람들은 OST와 영화가 찰떡이라고 하더라(맞아. 사실 이 영화도 보지 않았어). 제목처럼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걷는 기분을 들게 해. 왠지 그리스 신화가 생각나. 저승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오는 오르페우스가. 하나의 의심이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잖아. 그래서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게 되고, 에우리디케는 지하세계로 빨려 들어가지.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들으면 음악이 더 긴박하고 잔인하게 들려. 슬프기도 하고.

1-4. 내 생의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 에필로그

이 노래도 유명해. [햇살 가득한 교정]과 느낌은 비슷한데 더 여운이 있어. 기쁨에 여운이 남으면, 감동인가? 그래, 맞아. 감동적이야. 우린 슬퍼서만 눈물을 흘리지 않잖아. 기뻐서도 눈물을 흘리잖아. [내 생의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기뻐서 흘리는 눈물 같은 음악이야. 영화도 되게 감동적인 걸로 기억해(미안. 본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이 외에도 많은 음악들이 있지만, 다 열거하면 이병우 특집이 될 거 같아서 여기서 마칠게. 위에 소개한 4곡을 다 듣고 나면, 아마 나도 모르게 이병우가 작업한 다른 영화 음악들도 찾아 듣고 있을걸?


2. 올드 보이 – cries and whispers (이지수)

이 노래만 들으면 왜 우울해지는지 모르겠어. 올드 보이의 그 장면이 떠올라서인가 봐. 모르긴 몰라도 올드 보이만 5번 넘게 봤을 거야. 진우가 흥얼거리는 이 멜로디가……. 아니야 영화 얘기는 더 이상 안 할게. 나는 올드 보이가 한국 영화의 질을 높였다는 말에 동의해. 그 말에 덧붙여, 올드 보이의 OST 역시 한국 영화 음악의 질을 높였다고 생각해. 지금은 영화 음악의 거장이 된 이지수와 심현정, 그리고 조영욱. 조영욱도 이병우의 버금가는 한국 영화 음악의 거장이지. 그가 만든 유명한 노래가 뭐냐고? 바로.


3. 강철중 공공의 적 – 공공의 적 (조영욱)

예능에서 너무 많이 쓰여서 안 들어본 사람이 없지? 조영욱은 많은 박찬욱 영화에 음악 감독을 맡았어.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까지. 그 외에도 꽤 진중한 작품에 음악 감독을 역임했지. 유명한 곡이 참 많지만, 우리 귀에 익숙한 곡은 역시 [공공의 적]이 아닐까 싶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영욱은 이병우와는 달리 자신의 색을 살리기보다는 영화에 더 녹아들게 곡 작업을 하는 것 같아.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야.


4. 중독 – La pluie (정재형)

이 영화를 보지 않았어. 근데 음악만 들어도 뭔가 금기를 건드리는 느낌이 들어. 정재형도 영화 음악에 잔뼈가 굵은 뮤지션이야. 난 정재형을 무한도전으로 처음 알게 되었어. 언젠가는 알게 될 뮤지션이었겠지만, 무한도전 덕분에 좀 더 일찍 알게 되었지. 한때 그의 음악에 빠져 탐닉하듯 듣던 때가 있었어. 난 그의 어둡고 퇴폐적인 음악들을 좋아해. [편린]이나 [Longue Distance] 같은 음악. 그의 차가운 선율은 몸을 움츠러들게 해. 금기된 무언가를 탐미하는, 그래서 끝없는 저주를 받게 되는, 그럼에도 숙명처럼 좇게 되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들어. 금기된 무언가를 하는 날엔(물론 범죄는 안 되겠지) 그의 음악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

5. 럭키 – 32살 (방준석, 임미란)

한국 영화 음악의 거장 하면 방준석을 빼놓을 수 없지. 난 사도 OST인 [사도]도 굉장히 좋아해. 그는 영화 음악 감독을 하기 전에 락밴드인 ‘유앤미블루’로 데뷔했어. 왠지 이병우의 행보와 비슷한 느낌이 들지? 하지만 좀 더 와일드해.

[32살]은 굉장히 익살스러운 음악이야. 장난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꾸밈없이 순수하기도 하지. 노래를 듣다 보면 왠지 모르게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해. 노래 제목인 [32살]과는 대비되는 느낌이지.

방준석은 2022년 3월 26일 오전 7시 위암으로 별세하셨어. 음악계의 큰 별이 졌다는 것보다, 더 이상 그의 작업물을 들을 수 없다는 게 더 슬프게 느껴져.


라디오스타의 [비와 당신]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 싶어.

한국 음악, 특히 영화 음악과 모던 락의 지대한 영향을 주신 故방준석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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