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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천교육교사모임 Apr 29. 2021

소년을 읽다

소년을 읽다. 그리고 잃어버린 소년들을 찾아서.

<소년을 읽다>, 서현숙, 사계절 출판사. - 교사 함은희 씀

  이번 달의 책은 국어 선생님께서 소년원에서의 수업을 잔잔하게 기록으로 남긴 ‘소년을 읽다’이다. 처음 출간 소식을 듣고 읽고 싶었는데 미루다가 겨우 독서모임에서 읽게 되어 책장을 열었다. 안 읽고 미적거린 마음의 이유가 몇 가지 있었지만 일단 읽으면서 최대한 행간을 읽지 않으려 노력했고 선생님이 쓰신 그대로만 읽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 죽일 놈의 상상력은 자꾸 행간을 보게 하여서 괴로웠다. 소년원에 갈 정도의 소년들을 곁에서 지켜보기도 했지만, 또 그 소년들이 평소에 교실에서 얼마나 정도 많고  심지어 순하기도 했던 소년이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어서 참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럼에도 실제를 아는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생략되었을 상황. 소년들의 마음의 흐름. 선생님의 당혹감. 뭐 이런 것들이 자꾸 보여서 내심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였다. 


  한결같이 자라온 상황도 고달프고 아프고 피곤한 아이들. 성인들에게 반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켜줄 이 없는 아이들.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읽혀서 마음이 아팠다. 독서모임 후기에서 종필 샘께서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들을 보이게 해 주었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정말 딱 맞는 말씀이다.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소년들. 소녀들이 있다. 그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 살아온 세월 동안 네가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암묵적으로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왔을 그 스산한 마음. 그 서걱대는 마음결에 내가 다 춥고 시리다. 사실 모범생으로 살아온 나는 평생을 그런 느낌을 받아 볼 일이 없었다.  공부를 잘한다는 단단한 무기가 있어서 어디서나 기특한 사람으로 취급받았고 기독교적 배경이 있어서 어디서나 최소한의 배려와 선한 인상으로 인해, 정말 최소한의 무시와 모멸의 눈빛을 겪을 일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인생이 얼마나 구비 구비 모질고도 독한지 뜻하지 않게 이런저런 일로 그런 눈빛들을 받아보는 경험도 하고, 나와 같은 자유로운 영혼의 기질인 교사는 학교에서 뜻밖에도 무능한 사람 취급을 꽤 오랜 세월 받게 된다. 사실 나의 이 얄팍하고 짧은 세월에 겪은 경험은 그 많은 소년들과 소녀들이 살아온 시간 동안 피부에 스며들 정도로 겪은 모멸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수능 정시가 강화되는 이 이상하고 역사의 퇴행과 같은 교육환경에서,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학급 평균이 30점 내외인 것에 대해 놀라거나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단지 등급이 나뉘었는지 상위권에서부터 안정적으로 1등급부터 학생들이 잘 구별될 수 있게 한 줄로 나란히 잘 세워졌는지가 평가의 결과에서 가장 중요한 초미의 관심사이다. 학생들의 관심도 그렇고. 이는 어는 특정학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전국 모든 고등학교의 보편적 현상으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조금만 입장을 바꿔서 보면 고등학생이 되는 순간부터 뜻밖에도 지속적으로 대부분의 교과에서 50점 이하의 성적을 받는 학생이 되어 버린다. 중학생까지는 학원에 안 다니고 학교 수업만 듣고 시험공부하고 시험에 임해도 70점은 받았는데 갑자기 나는 30점짜리 학생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1년간. 2년간. 심지어 3년간 꾸준히 한다고 생각해보자. 아 나는 그런 아이들 앞에서 더 공부를 열심히. 노오력을 하기만 하면 된다고 채찍을 휘두를 자신이 없다. (실제로는 교실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잔소리는 하고 있다. 미안하다)


  내가 이상한 것인가.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우회적 이야기들과 수능시험을 잘 보게 하는 수업을 하라는 압박, 문학을 문학답게 읽어내는 능력을 기를 기회를 박탈당한 수업을 해야 하는 분위기에서 마음에 멍이 조금씩 들고 있다. 심지어 선생님 그렇게 보편적 해석을 문학작품에 하시면 아이들이 되려 수능을 더 못 볼 수 있어요. 수능 특강을 기준으로 해서 학생들이 공부해야죠 라는 ‘답정너' 문학 선생님들께 포위되어 나는 더 이상 발을 옮길 데가 없다.  그러한 충격적인 훈계를 어제는 갓 대학 졸업하신 임용고사 준비 중인 기간제 선생님께 들어서 사실 멘붕인 상태이다. 


  국어교육을 말하고 싶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지만, 자기를 표현하지 못하는 소년들과 소녀들. 자기 방어를 위한 말하기와 쓰기가 미숙한 소년들과 소녀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주눅 들고 풀 죽은 눈빛,  키는 180이 넘어가는데 성적만큼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쭈그리고 구부정하게 걸어 다니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 언제라도 가서 등을 토닥여주고 싶을 뿐이다. 


  문학교육의 성취기준 중에 가장 만만한 성취기준이 자아성찰을 하는 것을 문학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그 능력, 그 역량만 성취할 수 있어도 나는 문학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통렬하게 반성할 줄 알고,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하여 다시 조금의 힘을 내어 앞으로 한걸음 나갈 용기를 주는 일을 문학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학을 통해 배운 그 능력. 그러한 경험의 순간을 청소년기에 뼛속 깊이 배울 수 있다면 그들의 삶에 적어도 한 줌짜리 힘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 갱년기인지 눈물이 엉뚱한 지점에서 나올 때가 많다. 책을 읽을 때는 눈물이 하나도 안 났는데 독서모임 후기에서 서현숙 선생님의 담담하고 명랑한 말씀을 듣는데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 아무도 보호할 이 없는 빈 들에 버려진 것처럼 살아가는 그 동네 청소년들이 그렇게 장성해서 그렇게 거칠게 자란다는 것도 가슴이 아프고,  소년들 중에서도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감싸기 위해 어마어마한 변호사를 대동하고 법정에 서는 아이들도 생각나고, 방치되거나 일그러진 사랑으로 보호된 아이들이 최악의 인성으로 조건 강화되는 소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참 많이 난다.


  심지어 초등학생들 중에서도 부모의 어그러진 조건 강화로 당당하게 친구를 때리거나 해치는 일을 하는 꼬맹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자녀의 기를 살리겠다는 의도로 당당하게 때려, 내가 다 막아줄게 하는 부모님들이 너무나 많다. 


  갱년기이면서 중년이 주는 여유로움은 점점 더 나에게도 자비와 연민의 시선을 줄 수 있다는 것이고 그에 비례해서 더 깊은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타인을 대할 수 있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더 적극적으로 찾아서 소년들을. 소녀들을 더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건강한 부담감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의 내게는 어른들이 잃어버린 소년 소녀들이 바로 곁에서도 꽤나 눈에 들어온다. 대학입시를 이유로 평균 20점 30점을 받고도 아무 소리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 배움과 성장이 목적이 아니라, 정확한 서열을 위해서 당연한 듯 여겨지는 학교의 공기에 나는 정말이지 숨이 막혀온다. 학부모 민원을 피하고, 학생들과 학원의 닦달을 피하기 위해 수능특강이나 기출문제, 모의고사 문제집에 나오는 문구로 무장하고 거기서 한치의 어긋남 없이 수업과 평가를 구성하자는 높은 목소리에 나는 그만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그러한 압도적 분위기에서 무능감으로, 괴로웠던 이번 봄은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공포로 어지러운 시간이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아이들이 그곳. 그 철창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겨우 예체능의 진로를 잡아 마음을 다잡아 보았지만 웬걸 이 친구들은 이제 월수금 주말을 미술학원. 체육학원. 무용학원 등에서 저녁마다 시간을 보내야 하는 시절이다. 어깨가 처지고 두 눈이 빨개지도록 시험공부를 하고 저녁마다 학원을 전전하며 돌아다니고 주말마다 11시까지 공부하느라 지친 것을 아는데.. 선생님 저.. 문학시험  50점이 안 돼요.라고 한 학생이  쓸쓸하게 말하는데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 


쓸쓸한 눈빛. 고단한 어깨로 힘없이 다니는 우리 친구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우리의 소년들 소녀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눈을 감은 사회의 ‘어른들’에게 묻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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