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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천교육교사모임 Jul 31. 2021

‘당연한 것의 당연함’을 볼 수 있는 사람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권재원 ‘직업으로서의 교사’ 함께 읽

경기 실천교사모임 함은희

  가끔 기억나는 인상 깊은 대사의 드라마는 대장금이다. 어린 꼬마가 음식 맛을 보고는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힘든 세상에 살다가 그런 장면을 보니 퍽이나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의 당연함이 타인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인생의 큰 좌절을 만나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시간이 지나고 ‘당연함의 당연함’을 확인하게 될 때의 위로가 크다. 


  그러한 당연함에 대해 위로를 건네는 책을 이 여름에 만났다. 우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읽으려 했지만, 처음에 그런 선입견의 벽이 너무 높아서 그녀가 정말 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왜 그녀를 페미니스트 작가로 밀어놓았는지. 생각할수록 아쉬운 부분이다. 읽고 나니 그녀의 소설에서 이상도 보이고, 박태원도 보이고, 이효석도 보이고, 심지어 윤동주도 보이고, 한국 근대 문학의 연원이 될만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근대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느껴진다. 무의식 중에 그녀의 소설을 하나의 렌즈로 보려 했기에 그 렌즈로만 보이는 경험을 하고도 뭔가 아쉬웠다. 그래도 아쉬워 내용을 곱씹다가 문득 오늘 아침 생각해 낸 것. 이 소설이 댈러웨이 부인의 두 가지 인생의 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못한 길’이라는 시와 같은 기법의 두 가지 길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꺼운 장편소설이며,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위해 꽃을 사러 가는 장면을 시작으로 그날 밤 파티가 흥겹게 펼쳐지면서 끝나는 이야기이다. 이 정도의 소개만으로도 첫 50여 장은 집중이 어려울 정도의 대혼란일 것이라는 예상은 되실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만 더 인내하면 몰입하실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마시길 바랄 뿐이다. 


  댈러웨이 부인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특히 그녀와 교차점이 없는 그럼에도 다른 중요 축으로 이어지는 셉티머스라는 젊은 군인 이야기가 비중 있게 나온다. 전쟁에서 훈장을 받고 살아남아 사회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젊고 사랑스러운 이탈리아 여인을 아내로 둔 그.


  어느 날부터인가 옛 동료의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인간에 대한 환멸. 지독한 세상의 죄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하며 정신병적 징후를 보인다. 의사들을 만나보지만 되려 영혼을 짓누르는 억압적인 처방들을 내리는 것을 접하게 되고 그는 끝내 자살에 이르고 만다.    당시 만연했던 의사들의 잘못된 권위. 그를 낫게 할 아내의 사랑 가득한 동행보다는 분리와 격리, 요양원에의 감금의 처방만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번드르르한 말들의 위선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 그녀의 젊은 날의 모습인 클라리사에 대한 회상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첫사랑이었던 피터를 통해 클라리사였던 시절의 아름다움, 순수함과 함께, 피터가 아닌 지금의 남편 리처드를 선택하고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로 등장하고 있다.(클라리사가 피터가 아닌 리처드를 선택한 이유를 아마 피터는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듯하다.) 클라리사였던 시절의 그녀와 댈러웨이 부인인 현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소설 속에서 그녀의 마음. 그녀의 안타까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설명하려는 마음이 등장하고 있다. 


  그녀가 보았던 당연한 것들에 대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찌 보면 타협이고 어찌 보면 그녀가 더 지혜로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마음의 흐름이 읊조리듯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파티의 정점에서 셉티머스의 자살에 관한 소식을 의사를 통해 듣게 되고 일면식도 없는 청년이었지만 그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시간이 멈춘 듯 방에 들어가 청년의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상념에 잠기게 된다. 


  젊은 날의 클라리사가 보았던 당연함에 대한 추구들이 어쩌면 셉피머스에게 그대로 남아있었던 게 아닐까 한다. 생의 부조리. 악함의 구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하는 기적 같은 변화에 대한 기대들. 이 당연함 속에서 그저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 채 생을 살아간다면 조금은 더 행복한 나날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댈러웨이 부인은. 그리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생각하곤 한다. 그럼에도 그 이루지 못할 당연함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당연함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댈러웨이 부인의 남편 같은, 셉티머스의 아내와 같은 이들이 있어서 생은 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셉티머스의 소식을 듣고 댈러웨이 부인이 마음으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바로 오늘 아침 그녀 자신도 그랬지만) 두려움이라는 것도 있다. 부모가 손에 쥐어 준 이 인생이라는 것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 평온하게 지니고 가야 한다는 것에 덮쳐 오는 무력감.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끔찍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요즈음도, 리처드가 있어 주지 않는다면, 더 타임스를 읽으며 그가 거기 있지 않다면, 그래서 그녀가 새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차츰 되살아나 마치 마른 가지를 마주 비비듯 그 한량없는 기쁨의 불꽃을 피워내지 못한다면, 그녀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에서 그녀는 벗어났다. 하지만 그 청년은 자살을 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인생의 두려움. 태양의 열기와 겨울의 시련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그저 평범하게 곁에 있어 주는 그 사람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청년도 아내 곁에 있을 수 있었다면 더 나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들고.


  결국 댈러웨이 부인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의 당연한 것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갔던 것들에 대한 앎의 통로가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힘이라 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분들께도 그러한 재미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함께 읽기를 권해드리는 것은 권재원 선생님의 ‘직업으로서의 교사’ 권재원 선생님과는 페이스북에서 인연이 되어 늘 잘 배우고 있고, 현실에서 얼굴을 뵙고 늘 배우는 중이다. 권재원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교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 교사에 대한 당연함의 기준이 이거구나. 학교현장에서 내가 느꼈던 기시감. 당연한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울화에 대한 답을 들려주셔서 늘 감사할 정도였다. 교사로서 너무 우울하지 않게, 너무 지치지 않기 위해 이 길을 가려면 댈러웨이 부인도 계셔야겠고 타임스지를 읽으며 곁을 지켜주는 친구도 있어야 하리라. 그리고 교직사회에 대해 당연한 것을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직업으로서의 교사’를 읽어보신다면 고통의 수위는 낮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이 선택한 당연한 것들을 지켜내는 방법은 타인의 눈에 어찌 보이건 꿋꿋이 삶의 봉헌으로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 한때 파티는 아니지만 사람들을 연결하고 함께 모여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아. 끊임없이 파티를 열던 때가 있었다. (파티라기보다는 소모임이라고 하자.) 남들이 뭐라 해도 우리는 파티를 통해 지치고 외로운 일상을 다시 또 힘을 내서 걸어갈 힘을 비축하자. 이 여름 실천교사의 연수 파티, 방학을 누리는 파티를 통해 새 희망이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그리하여, 그래서 파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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