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평 1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천교육교사모임 Jul 31. 2021

생과 사의 경계에서

『강산무진』(김훈.문학동네)中「화장」을 읽고

박미정 씀

  죽어가는 아내 곁에서 젊은 여인을 향한 연정을 떠올리는 한 남자가 있다. 바로 김훈의 단편「화장」의 화자 ‘나’이다. 그의 나이는 55세이며, 화장품 회사 상무로 근무한다. 아내가 뇌종양 판정을 받고 죽음에 이르는 동안 그는 성실하게 남편 역할을 수행한다. 뼈와 가죽만 남은 아내의 몸을 씻기고, 아내의 발작을 감당한다. 투병하는 아내를 묵묵히 보살핀다.


  그런 그가 아내의 빈소를 지키며 회사 직원 ‘추은주’를 떠올리고, 그녀의 매혹적인 육체를 향한 갈망을 드러낸다. 아내가 죽었는데, 다른 젊은 여자의 자궁과 산도(産道)를 생각하는 늙은 남자라니! 당신 참 나쁜 남자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손가락질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작가는 단지 늙은 남자의 성적 욕망을 들춰내려 한 게 아니다. 여기에는 깊고 철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화자 ‘나’는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인간이란 존재를 대변한다.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똥물을 쏟아내는 아내는 죽음 그 자체이며, 생명력 넘치는 육체를 가진 회사 직원 ‘추은주’는 삶 자체이다. 그에게 ‘추은주’는 단순한 성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져 가는 ‘젊음’이며, ‘생명’이다. 그는 아내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추은주’에 대한 연정은 삶을 향한 열망으로 보인다.  


  성(性)은 생명의 근원이다. 성적 욕구는 살아 있음의 증표이다. 화자가 전립선염을 앓는다는 설정은 그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사실 ‘추은주’를 향한 연정은 화자의 마음속에 있을 뿐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생의 욕구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작가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삶과 죽음을 보여준다. 그 사이를 오가는 화자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줄 위에서 줄타기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나이 들고 죽는 것을 두려운 운명이라고만 여기면 발이 무거워지고, 몸의 균형이 깨어진다. 아차 하면 우울과 허무에 깔려 줄 아래로 떨어진다. 죽음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되 그것이 삶을 삼키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생의 욕구를 꺼내어 균형을 맞춰야 한다. 가볍고 자연스러운 발놀림으로 ‘지금 여기’의 삶을 즐기려 애써야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는 회사 여름 광고 이미지 문안을 ‘내면 여행’이 아니라 ‘가벼워진다’로 선택한다. 아내의 죽음과 회사 직원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 번민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죽음과 삶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보여 안심이 된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을 이토록 세심한 묘사와 단단한 문장으로 풀어내다니. 역시 김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연한 것의 당연함’을 볼 수 있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