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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천교육교사모임 Aug 03. 2021

첫 번째 주제: 나의 철학 2

강상준 씀

  글을 시작할 때 항상 제재가 주어지면 단어 뜻을 생각하게 된다. 철학. 서양의 어원에서는 학문을 사랑한다는 단어라고 한다. 단어의 의미에 사랑이 들어가다니. 정말 달콤하고 매혹적이며 중독성이 강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 인간사 많은 일이 일어나니 우리네 인생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이 ‘철학’이 아닐까? 그래서 ‘철학’은 종종 나의 신념이나 가치관, 판단 기준으로 쓰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들이 모여 하나의 사조를 이루면 우리가 학창 시절 끊임없이 외우고 읊었던 철학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 나의 인생철학. 즉, 인생을 살면서 가지는 나만의 가치관이나 판단 기준이 뭘까? 예전에 데카르트는 본인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고민하다가 의심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불변함을 깨닫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쳤는데, 나도 그렇게 근사하게 외치고 싶은데...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 못 되기에 그저 내 개똥철학이나 읊조린다. 그런데... 정말 세상에 불변하는 것이 있을까? 나의 첫 번째 인생 가치관. 세상에 불변하는 정답은 없다. 그저 그 시기와 상황에 맞는 해답만 존재할 뿐. 학창 시절을 포함하면 학교라는 공간에 20년 넘게 있게 되었다. 그 20년 넘는 기간 동안 학교는 정말 많이 바뀌었다. 학생이 잘못했으면 당연히 맞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이제는 그 어느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인식으로 바뀌었다. 학생관, 교사관, 행정 업무 등 바뀌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방향이 좋은 쪽인지 안 좋은 쪽인지는 판단을 유보하고라도.


  학교를 벗어나 사회적으로 봐도 그렇다. 찬양받던 정치 지도자가 한순간에 국민 역적이 되기도 하고, 정말 내 옆 사람이 방귀를 뀌는 것도 저 사람 때문이라고 욕을 먹던 사람도 지금은 그리운 사람이 되었다. 올곧은 위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뒤에서의 모습은 완전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정말 최악의 인간이었지만 알고 보면 속사정이 있어서 밝혀진 이후에는 찬양받는 사람도 있다. 정말 세상에 정해진 정답이 있을까?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시험 기간만 되면 정답이 있는 문제를 만들어야 하니 죽을 맛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가끔 시험 문제 나오는 정답만 알려주는 수업을 바랄 때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는 엄근진하게 “세상에 정답은 없다. 해답만이 있을 뿐. 특히 국어라는 과목은 특성상 더욱 그래야 한다.”며 이야기하지만, 결국 성적 민원이 무서워 정답을 딱 정해놓고 거기로 몰고 간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왜 나는 내 생각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직장.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내 가르침이라는 행위와 서류 작업이라는 행위를 제공해 얻는 재화, 즉 돈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럼 왜 돈 때문에 인생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것은 일정 범위 안에서 ‘나’에게 행동의 자유를 준다. 돈에 얽매이고 싶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돈에 얽매이지 않으려면 돈이 많거나, 일정 정도의 돈이 주기적으로 들어와서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아야 한다. 두 번째 가치관. 돈이 나를 자유케 하리라. 이 말은 학생들에게도 자주 해준다. 그리고 실제로 직장을 다니며 경제생활을 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면서 부모님의 인생 개입이 줄어들었다. 그 경험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면서 경제적 독립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물론 학생들에게는 경제적 독립보다 너희들이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부모님의 품을 벗어나고 싶다면서 경제적으로 자꾸 의존하는 게 얼마나 이율배반적이냐며 쏘아붙이는데 쓰는 대화 소재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반면교사를 통해 더욱 다지기도 한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같은 생각으로. 그 생각을 할 때 나타난 세 번째 가치관. 똥 묻은 개는 겨 묻은 개를 나무라면 안 된다. 누군가에게 나의 잘못을 지적받고 들을 때 대체로 수긍하지만 어떨 때는 정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는?’ 그리고 퍼뜩 깨닫는다. ‘아, 명색이 가르치는 사람이고 학생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면 나부터 그러면 안 되겠구나.’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 때리지 말라고 하려면 정말 나도 사람을 안 때려야 하고, 학생들에게 실내에서 실내화를 신고 다니라고 하려면 내가 먼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생 머리에 염색과 파마를 해본 적이 없다. 똑같은 사람인 학생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내가 한다? 그건 좀 요즘 말로 선 넘는 거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보면 선비라고 놀릴 정도로 최대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규칙은 최대한 지키려고 한다. 내가 규칙을 지켜야 공동의 안전도 보장되지만, 학생들에게 올바르게 지도할 수 있기 때문에.

  

  이외에도 가만 앉아 생각해보면 온갖 가치관과 신념이 똘똘 뭉쳐 있는 존재가 바로 ‘나’라는 존재일 것이다. 즉 ‘나’가 철학이고, 철학이 있기 때문에 ‘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 첫 번째 철학처럼 정답은 없기 때문에 이 철학들도 바뀌어 갈 것이다. 그래서 조금 무섭기도 하다. 변하지 않거나 이상하게 변해서 요즘 말하는 “꼰대”, “틀”이 되는 것은 아닐까? 꼰대라는 것도 결국 자기 철학의 완고함과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강권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 유연하고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야 할 텐데... 그런 유연한 사고를 위해서 정답이 없음을 인정하고 해답을 함께 찾아나가는 유연한 ‘나’로 바뀌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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