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주 씀
교육부 장관. 한때는 나의 최종 목적지였던 자리.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는 욕심과 교육계 전반의 상황에 대한 불신. 그것이 내 꿈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자리는 교육에 열망을 가진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일까. 다른 분야는 이렇게까지 직무와 관계없는 사람이 높은 직위에 올라가지는 않는 것 같은데. 왜 교육계에서는 자격이 부족한 이들이 윗자리에 앉아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까.
결국, 내가 장관이 될 일은 없다. 교육의 본질을 놓은 대가로 명성을 얻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도, 뜻도 없는 길은 내게 그다지 쓸모가 없다. 미래를 그려나가는 사람들의 선두가 되는 과정이 정계 진출, 동양철학과 졸업이라면 그런 자리는 필요 없다.
그러나 교육 경력이 있는 사람이 교육부 장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체제였다면 조금 다르게 생각했을 수 있겠다. 하다못해 현직 교사 중 한 사람을 교육부 장관에 앉혀놔도 지금보다는 덜 답답하지 않을까. 어쨌든 글의 주제가 이러하니 한낱 교사로서, 감히 교육부의 수장이 되는 미래를 떠올려 보자.
나는 원칙이 바로 서는 학교를 만들 것이다. 지금의 교실에는 원칙이 없다. 친구를 때려도, 선생님께 욕을 해도 아무 처벌과 제재를 받지 않는 사회. 그것이 학교의 본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이렇게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을 닮았을까’ 하는. 어른들의 사회에서도 편안히 앉아 ‘차별받는다’라고 악만 쓰면, 피땀 흘린 이들과 같은 대우를 바라도 다 들어주지 않는가.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지금은 아이가 잘못 커나가도 누구 하나 바로잡지 못한다. 아이들은 교사들의 경고와 제재가 순전히 말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물론 타인을 배려하며 올곧게 성장해 나가는 아이들 또한 있다. 그러나 법이란 10%의 악한을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이기에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라는 허울 좋은 핑계 하나에 ‘타인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라는 동서고금의 진리가 산산이 부서져 나뒹굴도록 방치하는 태도가 지금의 교실 붕괴를 만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원칙이 존재하는 학교를 만들 수 있을까? 흔들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친사회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억누름과 바로잡음의 구분에서부터 시작된다. 식물이 자랄 때 위에서 찍어 누르며 ‘너는 이렇게 자라야 해’라고 말만 한다고, 잘 자라날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돌덩이가 아닌, 흔들리는 자신을 잡아줄 단단한 지주대다. 교육 활동에 심각한 지장을 주거나 친구들과 선생님의 심신에 상처를 입힌 아동에게는 단호한 제재가 있어야 한다. 수업을 방해하는 아동을 담임교사 한 사람의 역량에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훈계를 담당하는 교사가 규정에 입각한 처벌을 할 수 있도록 구조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자신에게 불이익이 가해지는 시스템이 절실하다. 아이들 또한 인간이다. 인간은 마냥 선하지 않으며, 인간이 모인 사회에는 단호한 규율이 필요하다. 인간을 그저 아름다운 존재로만 바라보는 사람이 어떻게 천차만별의 인간을 사회화시키는 기관을 관리할 수 있을까?
체념한 마음으로 글을 시작하다, 차오르는 답답함에 마구 쏘아붙여 버렸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는 일그러져 있으며, 거북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현실은 이토록 어둡고, 현실의 연장인 미래 또한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부식되는 부분을 무시한다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