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천교육교사모임 Aug 15. 2021

네 번째 주제: 내 인생의 BGM 3

강상준 씀

그건네모의 꿈일지 몰라

화이트, 「네모의 꿈」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심지어 옛말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그 역사가 오래된 것 같다. 물론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계란으로 바위치”는 세상이었고,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던 무서운 시대가 길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세상을 둥글게 살라는 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도구 없이 완전히 둥근 모양을 그린 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냥 펜만 들어서 둥글게 그리려고 해도 어느 지점에서는 모가 나게 되어 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 둥글게 살아가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네모난 것들뿐인 세상에서 우리는 둥글게 살라는 걸 강요당하고 있다. 둥글게 사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오히려 너무 둥글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 사회를 분노 사회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걸 보면 우리가 보통 성격 좋다는, 논란이 없다는 연예인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우려 섞인 말을 할 때가 많다. 우리의 감정 중에 좋지 않은 감정은 없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행동만 있을 뿐. 그런데 우린 모난 성격이라는 말로 우리의 감정 중 일부를 배제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걸까?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가 둥글게 잘 굴러가기 위해서 구성원들은 모난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버려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자꾸 잊고 산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탐욕, 욕심이고, 그런 욕심이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켰을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정도의 능력도 없고, 평범한 인간들 아니겠는가? 그러니 평범한 진리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 성난 파도 아래 깊이 /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 흐느껴 울고 웃으며 /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은 /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철학을 전공한 신해철은 정말로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맞는 말일지도. 주호민은 『무한동력』에서 “죽기 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라고 물었는데, 이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말로 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훌훌 벗어던져야 한다. 알량한 자존심, 물욕, 인간관계 등. 다 벗어던지고 맨몸의 ‘나’를 바라보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심장이 터질 만큼 부끄럽고, 심장이 터질 만큼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흐느껴 울고, 웃어야 내가 단 한 번만이라도 이르고 싶은 곳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세상 모든 걸 의심하고, 고민하지만 그 고민하는 나 자신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존재 아닐까?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서태지와 아이들, 「교실 이데아」  


2001년,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사실 같은 담장 안에 바로 옆 건물로 등교했기 때문에 그렇게 설레진 않았다. 똑같은 등굣길이었고,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등교 시간이 50분 앞당겨졌다는 것. 7시 30분까지 학교를 오란다.

「교실 이데아」 가사가 귀에 꽂힌 이유는 바로 이 사실성이 아닐까 한다. 이르면 7시까지, 보통 7시 30분까지 고등학교의 등교는 모두 끝이 난다. 나는 그리고 언제나 7시 32분에 학교에 도착했고, 매일 교문에서 등교 지도를 하시던 선생님들께 그 선생님들께서 선호하시는 벌을 받고 교실로 들어가, 담임 선생님께 또 혼났다. 그럴 때마다 이 노래의 가장 첫 부분이 머리에 맴돌았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나는 10대에 ‘정말 왜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 와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정한 시간에 맞춰서 어디다 써먹을지도 모르는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20년 정도가 지는 지금. 나는 그 해답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내가 의문을 제기하던 것을 별 설득력 없는 말로 포장해 가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과연 내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내 말을 듣고 설득이 되었을까? 정말 학교 공부는 이해가 아니라 설득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 「서른 즈음에」     


대한민국에서 서른 즈음에 가장 많이 듣는 노래. 오히려 서른이 되면 듣지 않는 노래. 서른이라는 나이에 환상을 가지게 되는 목소리의 노래. 나는 이 노래를 스물다섯 대학교 기숙사에서 밤 11시 이후에 많이 들었다. 김광석의 목소리는 우리나라 사계절 언제든 밤과 참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공부하고 싶어 졌다. 특히 이 가사 부분을 들으면 말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다’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나는 ‘죽어간다’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살다’라고 하면 내가 무한한 시간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는다. 즉, 끝이 어딘지를 모르고 계속 길 위를 걷는 느낌이라 막막하다. ‘살다’는 출발선에서 길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죽어간다’는 끝을 알고 남은 거리를 따져서 내 체력을 분배해서 쓰는 느낌이 들어 좋다. 누군가는 ‘죽음’이 연상되기 때문에 싫다고 하겠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아닌가? 그 끝을 안다는 것은 남은 기간을 더욱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달리기를 할 때도 거리를 정해놓지 않고 무작정 뛰면 빨리 지친다. 그렇지만 골인 지점을 알고 있다면 거기까지 달리기 계획을 세워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죽어간다’는 표현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사는 (내 인생의 출발선에서) 또 하루 멀어지고, 매일 살았던 날과 이별한다는 느낌.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 무언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학교에 갓 복학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충만했기에 더 좋은, 더 나은 노력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정말 그때의 젊었던 나와 매일 이별하며 멀어지고 있다고... 그때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던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약간의 절망감도 이 노래를 들으며 느낀다. 나의 찬란했던 대학교 3학년 시절. 다시 돌아갈 수 없어 추억 보정이 되었겠지만 그때만큼 재미있고 좋았던 인생은 없었던 것 같다.                    



채 두 자리를 넘기기 어려운데 늘어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하지 말아야 할 게 늘었어

윤종신, 「나이」     


희한하게도 이 노래는 동아리 모꼬지 응원차 방문했을 때 후배가 불러서 알게 된 노래다. 노래랑 그것을 들은 환경이 너무 안 맞아서 노래가 기억에 남은 줄 알았다. 그런데 살면서 자꾸 이 노래가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남게 되었다. 왜 그럴까? 앉아서 가만히 고민해 본다. 목소리도, 음악도 아닌 가사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덧 삼십 대 후반이 되었고, 과거의 나와 비교를 하게 되었다. 정말 과거의 나는 겁이 많았고, 소심해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이 두려워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용기를 가지고 덤벼들 때가 많았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들이대기도 했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도 했으며, 술도 진탕 마셔보고, 수업도 내가 하고 싶은 거 막 도전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업과 활동지인데 그때는 그게 완벽하다고 막 덤벼들고 그랬었다.

지금의 나는 분명 그때보다 여유롭고, 용기도 나고, 하고 싶은 것도 막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에 비해 확실히 무언가 주저하고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머뭇거리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 말아야 할 게 늘었다는 느낌이 딱 맞는 것 같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네 번째 주제: 내 인생의 BGM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