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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천교육교사모임 Dec 03. 2021

우리에겐 <풀맨>이 필요해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박미정 씀


   요즘 흙수저란 말이 유행이다. 돈 많은 부모 밑에 태어난 아이들은 금수저이고, 그에 반해 평범한 부모 밑에 태어난 아이들을 흙수저라 한다. 연애 · 결혼 · 출산 · 내 집 마련․인간관계까지 5가지를 포기한 '5포 세대'에 이어 꿈과 희망마저 포기했다는 '7포 세대'. 이것은 금수저들과는 상관없는 흙수저들만의 이야기이다. 사회 계층 간 이동을 가능하게 해 주던 계층 사다리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적은 돈을 성실하게 모아가면 생활이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하기 어렵다. 은행 이자율을 턱 없이 낮아졌고, 서민의 경제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집값이 올랐다. 아이가 공부 잘해서 성공하려면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 있어야 한다는 웃지 못할 말이 유행한다. 자신이 속한 환경을 벗어나 꿈을 꾸는 일, 나의 의지로 삶을 선택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워졌다. 가난과 부의 대물림이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서 흙수저인 사람은 어떤 희망도 꿈도 가질 수 없다.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 애써보지만 결국 좌절과 절망뿐이다. 


   박민규는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 이런 우리 사회의 어두운 풍경을 잘 담아냈다. 주인공은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고등학생 승일이다. 승일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일찍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은다. 그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전형적인 서민층 자녀이다. 청소 일을 하다 쓰러진 엄마, 병든 할머니, 작은 회사에 다니다 사라져 버리는 아버지. 승일은 정해진 절차를 밟듯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다. 지하철 푸시맨 아르바이트를 하며 출근하는 아버지를 만원 지하철에 떠밀어 넣어야 했던 승일은 ‘자신만의 연산’을 일찍이 깨닫는다. 승일은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고 ‘세상엔 수학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68쪽)라고 말한다. 거대하고 추상적인 돈을 뇌물로 주고받았다는 정치인, 거액의 재산을 자식에게 주며 증여세를 내지 않기 위해 불법을 저질렀다는 재벌가. 그들의 삶은 승일처럼 시급 천 원, 천오백 원을 모아가는 ‘산수’ 인생과 너무 다르다. 서민에게는 낯설고 이상한 이야기다. 우리는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 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68쪽)는 승일의 말에 공감한다. 소소한 돈을 알뜰살뜰 모으지만 평생 집 한 채 사기 어렵고, 가족 중 한 명이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 빚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어느 봄날 지하철 역사 벤치에 앉아 졸다가 기린이 된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가 맞냐고 묻는 승일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승일은 기린이 된 아버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를 통해 자신 또한 기린임을 깨달았을까? 아니면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게 될까? 누군가는 승일이 더 큰 꿈을 갖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일은 아버지의 삶, 지하철 안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하는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무엇을 꿈꿀 기회가 없었다. ‘나는 결국 아버지의 연산이었다.’(82쪽)라고 내뱉는 승일의 말이 아프게 와닿는 이유다. 자본주의, 성과주의 시스템 속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승일이 이제 선택할 수 있는 삶은, 산수는 다양하지 않다. 아르바이트를 알선해주던 코치형의 말처럼 ‘열심히 사는 거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게 아닌가’(85쪽)하고 살아가거나 아버지처럼 기린이 되어 사회 밖으로 밀려나거나 혹은 스스로 떠나거나가 아닐까. 


   아무 잘못 없는 개인이 지옥 같은 세상으로 떠밀리고, 단순 연산을 하는 삶으로 끝장 보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인가? 작가는 사회가 문제라고, 이상한 세상이 문제라고 얘기하고 있다. 모두가 거창한 수학을 할 필요는 없다. 산수에서 끝장나는 인생도 있다. 다만 어떤 인생이든 각자가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수학 하는 인생보다 산수 하는 인생이 더 불행해서는 안 된다.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가족을 버리고 기린이 되어야 하는 건 승일이의 아버지로 끝나야 하지 않겠는가. 작가는 승일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왜 세상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이 없는 것인가’(88쪽)라고.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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