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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천교육교사모임 Jan 03. 2022

‘작아지기로 작정한 당신에게’ 드리는 새해 편지

함은희 씀

'내 따스한 유령들(김선우)'를 읽고

  올해의 마지막은 당신에게 보랏빛이 감도는 이 시집을 읽어드리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일은 더 쓸쓸하기도 하고 더 허망하기도 한 것 같다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그 쓸쓸한 고백을 삼키는 당신에게 이 시집을 같이 읽으며 함께 작아지자고 말하고 싶었어요. 


  늘 빨강 같았던, 타오르는 불꽃같았던 시인은 이번엔 약간 다른 빛깔을 뿜어내고 있어요. 그녀의 이번 시집은 빨강의 느낌보다는 은은한 보랏빛 같기도 하고 따스한 노랑의 햇살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이었지요. 오랜 시간 함께 시를 읽어왔던 친구들도 이 시집을 읽으며 정말 그 시인이 맞는가고 자꾸자꾸 앞장을 넘겨 시인의 이름을 확인해야 했답니다. 


  교사가 필요 없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학교가 무슨 필요가 있냐고 외치는 세상에서. 너희 같은 선생 같잖은 선생들, 싹 다 사라져 버리라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에서 이번 겨울, 우리는 더 많이 춥고 쓸쓸했지요. 해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의 일들이 그대로 업적처럼 쌓이진 않더라도. 모두가 허깨비처럼 사라지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늘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마네요. 


  그러니 당신과 함께, 작아지기로 작정한 우리에게 보내는 시인의 편지를 읽고 싶었어요. 시인은 시인이 없어서, 시가 있고, 시가 하는 일들이 이 세상을 지켜낼 것이라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너무 지쳐있고 너무 아등바등 살아가던 우리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날’의 기쁨을 노래하고, ‘오늘은 없는 날’이 되는 행복을 소개하고 있네요. 

오늘은 없는 날
행복하고 싶어서
구름 버튼을 눌러 당신 목소리를 들어요
나야, 바람이 좋아
나와 함께 당신이 살아 있어 이렇게나 좋아
더 많이 아낄 수 있어 더없이 좋은 날
사랑하는 일 말곤 아무것도 안 할래   

'오늘은 없는 날' 중에서

이런 기록은 어디에 묻고 묘비를 세워야 할까요? 
그들을 위해 허락된 땅, 울어줄 이 드무니 여기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시집은 울어주는 집이기도 하니까요.

'울어주는 일, 시를 쓰는 일'

  한 해 동안 당신이 언제 어떻게 행복했는지 저는 잘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 아무것도 아닌 날. 오늘은 없는 날이 되는 비밀을 알고 계신다면 그 비밀을 함께 하고 싶어요. 교사가 없어서 교육이 있고. 교육이 세상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으며 아무것도 아닌 날, 오늘은 없는 날의 행복과 기쁨을 당신과 나에게 주고 싶어요. 그러니 당신 올해를 마감하는 하루는 생기부는 잊고 오늘은 없는 날처럼. 실천교사모임이 추구하는 작아지기로 작정하는 기쁨을 같이 누려봐요. (정작 저는 모두가 조퇴하고 돌아간 교무실에서 저와 다른 분 두 사람만이 남아. 생기부를 쓰고 있지만요. 하하)


  지난겨울. 시 벗들과 모여. 시를 읽다 언제나처럼 눈물이. 뜨거운 눈물이 너나 할 것 없이 또르륵 흘렀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학교에서 한 헌신하고. 한 희생하고. 한 몸 바침으로 세월을 바쳤던 분들이 신데 전보내신을 앞두고 받는 느낌은 그저 소외감. 허망함을 동시에 느꼈지요. 우리는 그렇게 교사가 없어서 교육이 되는 세상에 사는 거고 그래도 결국 세상은 아름다워지겠지요. 우리는 다 티끌이구나. 티끌이라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봐요. 


한 티끌이 손잡아 일으킨
한 티끌을 향해
살아줘서 고맙다.
숨결 불어넣는 풍경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  (작은 신이 되는 날) 중에서
때로 울리라 불러도 좋은 티끌들이
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
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씩 공중 파도를 일으키는 티끌의 스텝,
찰나의 숨결을 불어넣는 다정한 접촉,
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는 역사는
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티끌이 티끌에게' 중에서


  허망함을 주제로 삶을 이야기하였지만 욕되지 않는 역사는 티끌임을 아는 티끌들뿐임을. 이 역사의 아름다운 역설이라니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 티끌이어서 역사에 욕되지 않는 것을 서로 축하하기로 해요. 


  찬란했던 젊은 날의 고된 수고가 학교라는 제도 앞에서는 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파도에 허물어지는 모래성과 같다고 그 허망함을 이야기하였지만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덧없음과 찬란함은 동의어이며 서로를 응원한다
응원이라는 말을 특히 나는 사랑한다 

'보르헤스와 보낸 15일' 중에서 


  덧없다고, 티끌이라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면, 당신 그것은 찬란함이라고 다시 정정해 주기를 바라요. 그리고 그런 당신과 나를 응원해요. 시인처럼 우리도 그 응원이라는 말을 특히 사랑하기로 해요. 우리 티끌들은 보이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을 ‘따스한 유령’으로 당신과 함께 새해를 맞이할 거예요. 당신의 곁에서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겠어요.


  당신의 티끌 됨. 그 *무연한 찬란함을 응원해요. 


  Happy new year!


*무연하다.   
1. 아득하게 너르다
2. 아무 인연이나 혈통, 법률 따위로 맺어진 관계 따위가 없다. 
3. 전생에서 부처나 보살과 인연을 맺은 일이 없다.
4. 죽은 이를 조문할 인연이 있거나 혈통, 법률적 관계를 가진 사람이 없다.
5. 크게 낙심하여 허탈해하거나 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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