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정 씀
이반 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 창비 / 2012
제목 그대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이야기이지만 막상 시작하려면 두렵고 불편한 이야기.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죽음을 대면하고 부정하고, 주변 사람을 원망하던 이반 일리치가 죽기 직전에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된다. 인간이 진짜 '죽어가는 일'을 보게 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너무나 생생하고 고통스럽다. 남보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가정을 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도 승승장구하던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옆구리 통증으로 죽음과 대면하게 된다. 나날이 고통이 심해지면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갖게 된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난 정해진 대로 그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잘못된 수가 있단 말인가?
- p.103.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은 이반 일리치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죽음 앞에 섰을 때에야 자신의 삶이 가치 있었지를 따져보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대부분의 인간의 모습이다. '내가 잘 살고 있나?'라는 질문을 죽음 앞에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해본다면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리저리 헤매며 방향을 찾지 못할 때 꺼내보는 나침반처럼 '죽음'을 꺼내 들고 나의 삶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따져볼 일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가까이 가서야 자신의 삶이 제대로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후회한다. 일에서 성공하고, 많은 재물을 모으고, 남 보기에 그럴듯하게 품위를 유지하는데 전력을 다 했던 삶은 모두 가짜였다. 그 삶 속에 이반 일리치 자신은 없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자 했을 뿐,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아내와 딸, 아들에게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했다.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나의 죽음을 보았다.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 '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어떻게 죽어야 할까?' 책을 다 읽고 나니 수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질문에 답을 찾아 한참을 끙끙대는데, 문득 아이와 함께 읽었던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가 떠올랐다.
매번 누군가의 고양이가 되어 메마른 삶을 살다 죽고 또 살아나기를 반복했던 고양이가 자신만의 고양이로 태어나 사랑에 빠진다. 가족을 이루고 사랑하다 죽는다. 그리고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고양이로 100만 번 죽고 다시 살아났던 고양이가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고, 그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했던 이번 마지막 삶이 가장 행복했기 때문에 환생을 거부한다.
그렇다. 삶과 죽음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삶 가까이에 죽음은 늘 자리하고 있다. 죽음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삶을 바라볼 때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더욱 소중해진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책이다. 남편에게 권해주니 말없이 받아 읽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에게 권해주니 흔쾌히 읽어 보겠다 하며 관심을 갖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궁금함을 가지고 있고, 사는 동안 의미 있게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나는 이 책을 가까이 두고 여러 번 읽으면서 '죽음'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끼고 '오늘'을 가치 있게 치열하게 살고 싶다.